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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연극’, 이 진부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햄릿’(사진)은 한마디로, 역작(力作)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이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요, 명작 중의 명작이 아닌가. 하지만 고전의 운명이란 것이 누구나 보아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제대로 보는 이는 없다고 했던가. ‘햄릿’ 역시 모두들 내용을 잘 알고 있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이 같은 ‘편견’을 보기 좋게 걷어차버리는 작품이 이번 명동예술극장의 ‘햄릿’이다.

고전을 무대에 올릴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변주(變奏)’다. 생각해 보시라. 400여 년간 수천, 수만 차례 공연된 연극을 또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당연히 색다른 해석이나 변형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같은 변주의 폭과 깊이를 어떻게 가져가느냐는 것. 너무 심하게 변형할 경우 원작의 주제나 묘미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당히 시대적 배경 등을 바꾸는 데 그친다면 “또 ‘햄릿’이냐”는 말을 들을 터. 숱하게 공연된 고전극으로 관객을 감동시키기란 그만큼 어렵다.

이번 ‘햄릿’은 그 같은 우려를 말끔히 걷어내고, ‘이래서 고전을 계속 무대에 올리는구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우선, 변주의 폭과 깊이를 결정짓는 전반적인 연출 측면을 보자.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무대와 의상을 비롯, 요즘 말투로 바꾼 대사는 절묘하다. 원전의 큰 줄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수백 년 전 덴마크 왕국에서 벌어진 비극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인 듯 다가온다.

극 중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작품의 강조점에 있어 이번 ‘햄릿’은 몇몇 특징적인 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중 여성들의 비중을 한결 높인 것이 눈에 띈다.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드와 연인인 오필리어의 비중이 원전에선 상대적으로 약한 데 비해 이들의 캐릭터를 특징화하고 극 중 역할을 강화한 것. 서주희가 연기하는 거트루드는 욕정에 휘둘리고,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도 아들인 햄릿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는 이중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서주희의 ‘미친 듯한’ 연기는 압권이다.

전경수가 열연하는 오필리어 역시 캐릭터를 더욱 구체화시켰다. 한 점 티끌 없는 철부지 소녀에서 햄릿의 사랑을 저울질하는 숙녀로, 끝내는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실성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오필리어의 비극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전경수는 이 같은 변신을 출중하게 소화하고 있다.

햄릿 역의 정보석, 숙부 클로디어스 역의 남명렬, 신하 플로니어스 역의 김학철 등의 빼어난 연기도 높이 살 만하다.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살려 특징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정보석은 그야말로 ‘흔들리는’ 햄릿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사실, 고전극에 있어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이야말로 관건 중 관건이다. 틀에 박힌 연기를 할 경우 관객들은 금방 식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출연배우들의 호연이야말로 이번 ‘햄릿’의 일등공신인 셈이다.

정승호 서울예술대 교수가 맡은 무대디자인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양철판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이용한 무대설치는 극의 주제를 담고 있는 ‘거울의 이미지’에서 극에 긴장감을 더하는 소리까지 거의 소름끼칠 정도로 구현해내고 있다. 음향과 조명 역시 전반적인 극의 전개와 톱니바퀴 물린 것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가장 큰 점수를 줘야 할 것은 역시 연출이리라. 이 모든 것을 무대에서 맞춰 낸 오경택 연출의 자로 잰 듯한 연출력은 달리 더 찬사를 보탤 수 없을 정도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를 극의 에필로그 부분으로 빼내 강조함으로써 이제는 진부해진 이 대사를 다시 한번 관객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시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2시간 30분의 짧지 않은 공연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기에 충분했다. 공연은 29일까지. 1644-2003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