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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 안형주 지음 /푸른역사

미국의 ‘디트로이트 데일리 뉴스’는 각국 이민자들 중 성공한 사람들을 뽑아서 ‘내가 어렸을 때 조국에서’라는 주제로 책을 쓰게 했다. 한국인으로는 찹수이(Chop suey·잡채라는 뜻) 통조림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이 지목됐다. 유일한이 쓴 ‘내가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When I Was a Boy in Korea)’라는 책이 1928년 출판됐다. 유일한 등이 창립한 ‘라초이 식품회사’를 그만둔 정양필과 조오홍, 안재창(1873∼1963)은 1922년에 디트로이트에서 ‘정안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라초이식품과 쌍벽을 이루게 된다. 유일한에 자극을 받아 중국 음식 도매업을 시작한 정안회사는 크게 성공했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됐다. 안재창은 동업자들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면서 안살림을 도맡았다. 특이하게도 안재창은 구한말에 조국을 떠나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던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이다.

저자는 1902년 고종이 미국으로의 노동 이민을 허락함에 따라 구한말 가난한 집안의 농부로서 제물포에서 첫 하와이 이민선을 탔던 안재창의 가족생애사를 집요하게 발굴·추적했다. 미국 동부 한인 이민사의 공백을 메운다는 의미를 넘어 20세기 전반기에 언어·문화가 낯선 외국 땅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한 인간의 드라마가 담겨있는 책이다.

저자의 수집열이 없었다면 구한말 안재창의 유민원(대한제국 당시 외국여행을 관장하던 기구) 여행장(지금의 여권), 그가 불법체류자로 동포에게 밀고를 당했을 때의 이민국 인터뷰 자료, 정안주식회사 해체 신고서는 물론 안재창의 인감도장까지 입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인으로 모든 결재를 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던 인감도장에는 안재창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금의환향의 꿈이 서려있다.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구한말 첫 미국 이민자인 안재창의 삶을 치밀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안재창은 경기 양주군 별비면의 죽산 안씨 집성촌에서 몰락한 사대부 종갓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감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쇠잔해가는 대한제국과 전통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외국으로 나가 생을 개척하기로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중노동을 해야 했다. 안재창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 본토로의 밀입국을 감행한다. 떠돌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에서 인기 있는 정원사로, 이어 소규모 농지개간 사업자로 성장하는 굴곡 많은 그의 삶이 책 속에서 펄떡이며 살아 숨쉰다. 그는 1915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 중부 대평원에서 세 번의 농지개간 사업을 벌여 성공했다. 그의 전성기는 정안회사를 운영할 때였다. 유일한의 라초이식품이 중국 음식을 통조림으로 팔았다면 정안회사는 방금 만든 중국음식을 도매나 소매로 판매했다. 정안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요 음식재료인 숙주나물과 채소 등을 정갈하게 관리하고, 다루기 쉬운 배달용기를 쓰는 등 뛰어난 사업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1927년 정안회사는 1년 만에 3만5000달러라는 매상을 올렸다. 이는 당시 국내외를 통틀어 믿기 어려운 성공담이었다. 저자는 “초기 재미 한인들이 생계를 위해 경영한 중국 음식 도매업은 모자이크 같은 다문화 미국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 미국인과 재미 한인 사이 문화소통의 첫발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사진 결혼이라는 재미있는 풍습도 있었다. 초기 미국 이민자들이 조선으로 사진을 보내고, 또 신부의 사진을 받은 뒤 결혼하는 것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갔다.

책은 당시 재미교포의 독립운동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나이가 많아 미국 문화에 적응이 안 된 안재창은 어느 재미교포보다도 열심히 임시정부를 도왔다. 임시정부 지원금인 인구세, 광복군 지원금인 혈성금, 국민회 의무금을 꼬박꼬박 냈고, 심지어 어린 아들 광호 이름으로도 ‘독립금’을 10달러씩 주기적으로 냈다.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서 자주 독립과 반일정신이라는 두 가지 이념이 한인들을 대동단결시키는 구심점이고 대의명분이었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안재창과 동업했던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안재창은 이승만 전 대통령도 적극 도왔다.

책에 따르면 안재창은 또한 무의식중에 집단 지향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추구했다. 그는 언제나 같은 처지에 있는 동지들을 발견, 규합해 유대감을 조성하고 공동 목적을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자기 문중의 인물인 안재창 개인의 삶을 ‘라이프 히스토리 방법(Life History Method)’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추적하면서 당시 시대상과 안재창이 처한 사회 환경, 생활 조건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나갔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