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강신주의 감정수업 / 강신주 지음 / 민음사

‘문학과 철학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향연(饗宴).’ 이 책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저술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대중과 긴밀하게 소통을 주고받아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저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분류에 따라 48가지의 감정을 유명 문학작품과 엮어 펼쳐 보이고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48가지로 나눠 그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했던 철학자였다. 저자는 그 하나하나의 감정을 저명한 작가들의 소설과 연결시켜 매우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저자가 동원하고 있는 작가들은 동서고금의 명망가들이다. 빅토르 위고, 프란츠 카프카, 어니스트 헤밍웨이, 도스토옙스키, 알베르 카뮈, 에밀 졸라, 이반 투르게네프, 밀란 쿤데라, 기 드 모파상, 펄 벅, 조지 오웰, 도리스 레싱, 슈테판 츠바이크, DH 로렌스, 서머싯 몸, 유진 오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48명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대표작 또는 주요작에서 구체적 사례를 인용, 특정한 감정을 설명한다.

예컨대 ‘연민’이란 감정을 보자. 스피노자는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규정했다. 간단하게 말해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감정을 저자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을 통해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 호프밀러 소위는 지역 유지의 딸 에디트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 멋진 댄서를 꿈꾸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된 아름다운 에디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호프밀러의 연민은 에디트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하지만 호프밀러의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에디트가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상황은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불구의 여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연민과 사랑은 엄연히 다른 감정임을 소설은 치밀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소설에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을 인용한 후, 두 남녀의 관계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저자는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며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또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라며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연민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다.

책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저자의 통찰력 있는 해석과 활달한 문체다. 거칠 것 없이 내닫는 문장들은 읽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비루함·자긍심·경탄·경쟁심에서부터 수치심과 복수심에 이르기까지 48가지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는 각 챕터의 끝에선 작품을 인용한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각 챕터의 맨 마지막에는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라는 타이틀로 저자 특유의 조언을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유명 문학작품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느꼈던 특정한 감정이 어떤 종류의 감정이었으며,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저자는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책 전반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매우 설득력 있지만,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조금 과한 주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편 들기도 한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