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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해 오는 2015년부터 시행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놓고 산업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가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선 유럽연합(EU)·미국·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라며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환경단체와 야당 국회의원들은 재계와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을 화평법의 입법취지를 왜곡하고 시행령을 통해 법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한다. 과연 국민건강을 위해 화평법을 원안대로 시행해야 할까, 아니면 기업활동을 위해 수정할 필요가 있을까. 화평법 도입 논란과 관련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1. 화평법의 목적과 주요 내용은

화평법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의 위해성으로부터 국민건강과 환경을 보호하고 화학물질의 등록과 평가를 의무화하기 위해 제정됐다.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과 국내시장에 처음 유입되는 모든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 유해성 심사를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다. 기업들은 연간 1t 이상의 기존 화학물질이나 신규 화학물질을 제조·수입할 때 매년 용도와 제조·수입량 등을 등록해야 한다. 또 해당 화학물질을 등록할 때는 제조·수입 물질의 용도·특성·유해성·위해성에 관한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환경부는 등록 자료를 토대로 유해성이 있는 물질은 ‘유독물질’로, 위해성이 있는 물질은 ‘허가물질, 제한물질, 금지물질’로 지정해 고시한다. 기존화학물질은 국내 유통량, 유·위해성 정보 등을 고려해 등록대상이 사전에 고시되고, 등록유예기간이 부여된다.

2. 어떻게 제정됐나

지난 2007년 EU가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를 도입하는 등 해외에서 화학물질에 대한 관리 체계를 강화하자 국내에도 법 제정 움직임이 시작됐다. 2010년 말부터 정부와 산업계는 17회에 걸친 간담회를 통해 합의안을 이끌어냈고, 정부는 이를 토대로 지난해 9월 화평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지난 4월 초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이 보다 강력한 규제를 담은 화평법 제정안을 발의하면서 방향이 틀어졌다. 이 법안은 불과 22일 만에 국회 환경노동위와 법제사법위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했다.

3. 기존법과 다른점은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서는 화학물질의 제조·수입량이 연간 0.1t 이하의 소량인 경우 유해성 심사를 면제했다. 하지만 화평법은 하한 규정을 삭제해 모든 신규화학물질에 대한 등록을 의무화했다. 화평법은 또 화학물질 제조·수입자에게 모든 신규화학물질의 제조 또는 수입 전에 정부에 등록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제조·수입자는 신규화학물질의 등록 신청 때 유해성 자료 등 등록 신청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미등록 또는 거짓 등록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 벌금 등을 부과받는다.

4. 기업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관련 업계는 등록 대상 물질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우려한다. 사실 환경부는 화평법 제정 이전, 신규화학물질 등록 최저기준을 연간 0.5t으로 정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특히 의견 수렴을 거친 정부 합의안에는 연간 1t까지 완화됐다. 하지만 심상정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최저 기준이 삭제됐다. 재계는 규제 완화 방침은 사라지고, 기존 규제 하한선마저 사라지면서 모든 신규화학물질까지 규제 대상이 넓어졌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제조·수입량을 고려해 등록 자료를 차등화하고, 등록 통지기간 단축 등 절차 간소화를 통해 산업계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소량의 신규화학물질 등록은 원칙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미지의 신규화학물질이 아무런 정보없이 국내에 유통될 경우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고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우려다.

5. R&D용 화학물질이 왜 문제인가

연구·개발(R&D)용 화학물질의 등록 여부는 논란의 중심에 있다.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시행령에는 ‘화학물질 또는 화학물질이 함유된 제품을 개발하거나 공정을 개선하기 위해 제한된 장소에서 조사·연구자만 사용하는 신규화학물질’은 유해성 심사 면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화평법은 R&D용 화학물질도 모두 등록하도록 했다. 산업계는 상용 제품 생산을 위한 공정 개발이나 공정 개선활동 등을 위한 R&D용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주, 캐나다, 미국 등도 R&D용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심사를 면제한다.

환경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제품의 개발 또는 공정 개선을 위한 화학물질은 환경부장관 확인을 거쳐 면제 대상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환경부는 순수 연구 목적만으로 제한적으로 예외를 인정할 방침이다.

6. 기업 영업비밀 유출 가능성은

화평법이 제조·수입자가 요청할 경우 사용·판매자는 화학물질의 용도, 노출정보, 사용량과 판매량, 안전 사용 여부 등의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사용·판매자가 제조·수입자에 요청한 경우도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산업계는 이 같은 행위가 화학물질의 안전한 취급과 무관한 정보까지 포함함으로써 영업비밀을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재계는 이러한 이유로 혼합물질의 구성성분과 함유량 등 영업비밀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항은 하위법령을 통해 예외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영업 비밀 침해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학물질 안전 관련 정보가 아닌 부분은 최대한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요청이다. 반면 환경부는 화학물질 등록신청자료 제출 시 영업비밀 보호를 위해 자료 보호 요청을 할 수 있고, 이 경우 해당 자료는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영업 비밀을 침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7. 외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화학물질 등록과 평가에 관한 법률을 두고 있다. 하지만 예외 규정을 두고 나라들마다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화평법은 소량이라 하더라도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유해성 심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EU와 미국, 일본, 호주, 필리핀 등은 면제 규정을 두고 있다. 소량 화학물질에 대한 연간 면제 기준 역시 우리나라는 없지만 호주와 캐나다는 100㎏ 이하, EU와 일본, 필리핀은 1000㎏ 이하, 미국은 1만㎏ 이하로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중국도 모든 신규화학물질을 대상으로 독성자료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8. 기업부담 얼마나 늘어나나

재계는 현재의 화평법이 수정없이 시행되면 화학물질 등록에 필요한 제출 자료 준비에 드는 비용이 물질당 평균 5700만∼1억1200만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국내 검사기관을 이용해 1t 이하 화학물질의 급성독성과 유전독성 2종, 분해성 등 독성자료 4가지를 검사하는 데 2500만 원이 들지만 화평법이 시행되면 물질의 순도 및 동질성 확인, 물리화학적 특성 검사 등 추가 검사 비용 부담이 물질당 3000만~3400만 원씩 더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환경부는 이에 대해 등록 유예 기간을 둬서 등록을 하지 않고 제조·수입할 수 있는 기간을 설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협력해 자료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비용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9. 주한 외국기업들의 반발 이유는

화평법에 대해서는 국내 기업뿐 아니라 외국 기업들도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는 최근 화평법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서한을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에 보냈다. 암참이 반발하는 이유나 건의사항은 국내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암참은 연구개발용 화학물질의 등록 면제, 일부 신규 화학물질의 등록 예외 인정 등을 건의했다. 암참은 서한에서 “화평법 규제 수준이 높아 한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며 “법 시행에 앞서 기업들과 충분히 협의하고 보완책을 마련하는 등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청했다.

10. 정부의 수정 방향은

정부는 화평법이 기업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폭넓게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관련 부처와 산업계 대표,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지난 3일 1차회의를 열었다. 정부는 연말까지 총 20여 차례 협의체 회의를 열어 업계의 우려를 반영한 시행령·시행규칙을 제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주무 부처인 환경부도 업계가 그동안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국내시장 출시와 관계없는 R&D용 화학물질은 환경부 장관 확인을 거쳐 등록을 면제할 수 있도록 하고, 소량의 화학물질은 등록에 필요한 제출 자료를 최소화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박영출·장석범 기자 eve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