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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 조한 지음 / 돌베게

저자가 머리말에서 인용하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말. ‘시간은 곧 기억이다.’ 하나의 공간에는 그의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기억, 바꿔 말하면 ‘거대한 시간’이 쌓여 있다. 그걸 저자는 ‘꼭짓점이 평면에 닿아 있는 뒤집어진 원추 형태’로 상상한다. 그러고는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이 원추의 단면을 잘라내 관찰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서울에서 나서 줄곧 성장한 건축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서울의 공간 스무 곳을 찾아 시간의 단면을 잘라내며 관찰한 기록이다. 저자는 현재의 공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며 건축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거기 사는 이들을 진지하게 관찰하며 그곳에 새겨진 나이테 같은 시간을 재구성한다. 저자는 건축가지만 서울의 건축과 공간을 분석하는 도구는 이론과 미학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과 대중의 기억, 그리고 역사다.

책은 저마다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홍대앞, 서촌, 인사동, 신사동, 정동의 골목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이 공간에서 주로 주목하는 건 성장과정 속에서 만났던 정겨웠으되 어쩌면 누추했던 것들의 잔존물들이다. 통일감 없는 색상이나 재료, 생계를 골조 삼아 복잡하게 얽힌 건축물에 매료되고, 쓰러져가는 낡은 점포, 철거를 앞둔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그 길에 대한 사적 추억에서부터 변모의 과정, 오래전의 역사를 두루 짚어낸다. 이를테면 인사동의 거미줄 같은 좁은 골목길의 매력을 세심하게 하나하나 짚기도 하고, 별 볼 일 없었던 홍대앞이 젊은이들이 오는 거리가 된 연원을 살핀다. 또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상점이 밀집한 신사동 가로수길에서는 이 길의 연원과 함께 건축 유행의 흐름을 짚는 식이다.

이어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충정아파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처럼 낡고 별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공간에서 사적인 기억과 함께 따스한 추억담을 끄집어낸다. 이런 곳들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곧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애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낡고 누추하고 버려진 공간도 삶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남겨둬야 한다는 것일까. 저자는 수도가압장으로 쓰던 건물에 들여놓은 윤동주문학관이며, 정수장을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선유도공원’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보여준다. 낡고 버려진 공간들을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루며 문학관이나 공원처럼 새로운 가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데 대해 찬사를 보낸다. 저자에 따르면 윤동주문학관에서는 ‘작고 오래된 공간이 주는 깊고 묵직한 울림’을, 선유도공원에서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공간에서의 철학적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스무 곳의 공간을 살피면서 저자가 반복해 주장하는 건 공간이나 건물의 가치는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지어진 과정과 의미, 그리고 시간의 깊이에 있다는 것. 그래서 고쳐 짓고, 무너뜨리고, 미관에 몰두하기보다는 본래의 공간이 지닌 의미와 시간을 오롯이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