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서 벌어진 싸움이 오프라인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뜻의 ‘현피’의 유래는 지난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니지 등 온라인 RPG 게임(사용자의 캐릭터로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이 한창 유행하면서 게임 속 상대 캐릭터를 공격하는 ‘PK(Player Killing)’가 실제로 일어난다는 의미로 현실의 ‘현’자가 ‘PK’의 ‘피’ 앞에 붙었다.

당초 현피는 폭력적인 온라인게임 이용자 일부에게 통용되는 개인 대 개인 간 다툼이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온라인게임을 즐긴 최모(27) 씨는 “분신 같은 캐릭터가 다른 플레이어의 공격을 받아 죽는 것은 일부 ‘폐인’들에게는 실제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라며 “PK를 당하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모아놓은 각종 아이템과 장비를 잃어 현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대 중반 현피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인증하는 문화가 생기면서 당초 개인 간 다툼이었던 현피의 의미는 변질됐다. 사적인 다툼이 구경꾼들 앞에 서자 공적 결투로 진화한 셈이다. 여기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성화되면서 현피 약속이 퍼져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관전하는 네티즌 역시 많아졌다.

신용태 한국인터넷윤리학회 회장은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부 네티즌에게 이 공간에서 모욕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며 “네티즌들의 부추김까지 겹쳐져 현피 당사자들은 마치 검투사가 된 듯 구경꾼들 앞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언론에 현피로 인한 폭행사건이 소개된 것도 이때쯤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006년 8월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부근에서 고교생 두 명이 군중 앞에서 벌인 싸움이다.

지금껏 네티즌들 사이에서 1호 현피로 회자되는 이 사건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패션갤러리 게시판에서 아이디 ‘의정부 고딩’의 티셔츠를 ‘껌팔이’가 트집 잡으면서 비롯됐다. 네티즌들은 ‘진짜 만나서 제대로 싸우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았고 ‘지면 게시판을 떠나야 한다’는 온라인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 2월 디시인사이드의 ‘애니-일본갤러리’ 네티즌들이 벌인 일명 ‘애갤 현피’도 유명하다. 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두고 며칠 간 설전을 벌인 두 네티즌이 서울 마포구 공덕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싸움을 벌였다.

현장에는 여러 명의 네티즌들이 몰려 현피를 부추겼고 실황 중계를 담은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전세계 네티즌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현피는 더욱 흉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2010년 9월 대구에서는 인터넷방송 게임 진행자가 방송 중 욕을 했다는 이유로 게임동호회 회원들 10여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지난 10일 부산에서는 인터넷상의 이념 문제로 현피가 살인 사건으로 번졌다.

이웅혁(경찰학) 건국대 교수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는 상대에 대한 비방이 여과 없이 전달돼 분노 조절이 어렵다”며 “원인과 해결책이 폭력으로 점철되는 만큼 건전한 놀이문화로서의 현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