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재훈 가천의대 길병원 교수가 혈액암 진단을 위해 환자의 골수를 채취하고 있다. 길병원 제공

A(여·64) 씨는 2년 전부터 아들 정모(35) 씨에게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어지럽다”고 말하곤 했다. 정 씨는 갱년기가 온 어머니가 일시적으로 빈혈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해 동네 내과의원에 모시고 갔고, 의사 역시 빈혈이라 진단했다. 정 씨는 어머니에게 철분제와 비타민 영양제를 한 아름 안겨드렸다. 1년 후 A 씨는 이번엔 늑막염 증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3, 4번 척추가 으스러져 있었다.

A 씨는 감기 증상을 보이며 기침을 자주 했는데, 병원에서는 골다공증 증상이 있어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라 했다. 정 씨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골다공증 치료에 전념했다. 한의원도 모시고 가고, 한 번에 30만 원 하는 허리 주사를 맞히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는 허리가 더 굽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정 씨는 최근 어머니를 모시고 정형외과의원에 갔다가 단순 골다공증 증상이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이후 대형병원에서 정밀검사 끝에 어머니가 ‘다발골수종’이라는 혈액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알고 보니 빈혈, 골다공증 등 증상도 모두 다발골수종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정 씨는 “2년간 다발골수종과 상관없는 치료를 받으며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며 “질환이 생소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를 짚어내지 못한 의사들이 야속하다”고 말했다.

▲원인 알 수 없는 혈액암, 빨리 발견해도 말기

혈액암은 여전히 낯선 질환이다. 대표적인 혈액암인 백혈병을 영화나 TV의 여주인공을 통해 만나는 정도다. 일반적인 암 질환이 서구화된 식습관과 흡연, 음주 등을 통해 발생한다고 밝혀졌지만, 혈액암은 그 원인도 미궁 속에 있다. 한 해 국내 발생 환자가 1만 명이 안 되는 희귀질환이라 일반인들에게 관련 증상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위암과 폐암 등 일정 부위에 형태를 갖고 존재하는 고형암과 달리, 혈액암은 특별한 발병 위치와 형태가 없다. 혈액암은 혈액과 골수 내에서 비정상적 세포가 통제 불가능하게 증식해 발생하는 종양인데, 다른 건강한 혈액세포를 줄여 인체의 면역 기능을 떨어뜨린다.

이로 인해 극심한 빈혈과 피로, 감염, 과도한 출혈(코피 및 양치질할 때의 출혈 등) 증상이 나타나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암세포가 과다하게 증식돼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혈액암의 병소가 아무리 작더라도 병기 개념으로 말기인 4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혈액과 골수에 종양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신에 암세포가 퍼져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고령화사회에 급속히 증가하는 혈액암

과거에 드문 질환이었던 혈액암 환자의 증가가 심상치 않다. 최근 들어 백혈병뿐 아니라 다발골수종, 림프종, 골수형성이상증후군, 골수증식종양 등 혈액암 빈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혈액암 환자는 7937명으로 전체 암의 약 4.6%를 차지한다. 최근 10년간 주요 혈액암종별 신규 환자 수 증가추이를 보면 비호지킨 림프종이 89%, 다발골수종이 122% 증가, 같은 기간 전체 암 환자 수 증가율인 51%를 상회하고 있다.

특히 다발골수종은 20년 전에 비해 환자수가 10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된다. 서양의 경우 전체 암의 약 10%가 혈액암인데, 우리나라도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혈액암 발생 빈도가 증가해 향후 10% 수준까지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훈(혈액종양내과) 가천의대 길병원 교수는 “혈액암 환자 10명 중 4명은 60대 이상”이라며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혈액암의 유병률과 사망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위암 등 주요 고형암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지만, 아직 혈액암에 대해서는 관심이 낮다”며 “혈액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만큼 예방이 어렵기 때문에 노년층과 6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비호지킨 림프종, 다발골수종, 골수성백혈병 등 대표적 혈액암의 주요 증상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면역기능 저하로 빈혈, 출혈이 일반적 증상

비호지킨 림프종은 가장 흔한 혈액암으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림프 조직에 생긴 종양을 말한다. 림프종은 조직 형태에 따라 비호지킨 림프종, 호지킨 림프종으로 나뉘는데, 국내의 경우 비호지킨 림프종 환자가 93% 이상 차지한다. 목 주위, 겨드랑이, 사타구니에 통증 없는 혹이 만져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평소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또 잠잘 때 옷이 흠뻑 젖을 정도의 야간 발열이 있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38.3도 이상의 고열이 지속될 경우 림프종을 의심해봐야 한다. 최근 6개월 동안 10% 이상 체중이 감소한 경우도 유의한 증상이다.

다발골수종은 항체를 생산하는 형질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해 뼈를 부러뜨리고 면역장애, 조혈장애, 신장장애를 일으키는 치명적 질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리, 갈비뼈 통증 혹은 골절이 빈혈, 신장장애와 함께 복합적으로 올 경우 다발골수종을 의심해봐야 한다. 다발골수종은 발병 후 생존기간이 3년 정도로 다른 혈액암에 비해 완치가 어렵지만, 최근 암세포롤 직접 죽이고 면역기능을 활성화시키는 표적항암제가 개발돼 치료효과가 향상됐다.

백혈병은 골수 속에 종양세포가 생기는 질병으로 악화 속도에 따라 급성과 만성으로, 공격 받는 백혈구의 종류에 따라 림프구성과 골수성으로 나뉜다. 이 중 골수성 백혈병이 중장년층에 많이 나타나며, 특히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경우 즉시 치료를 하지 않으면 3개월 내에 90%가 사망할 정도로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르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경우 대부분의 환자가 극심한 빈혈을 경험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상적인 백혈구의 부족으로 저항력이 떨어져서 각종 감염증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혈소판 감소로 멍, 코피, 잇몸 출혈이 나타난다. 반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초기에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더 관심이 필요하다. 쇠약감, 피로, 식욕부진, 복부팽만, 발한 등 증상이 있고, 비장·간 비대로 병원을 찾았다가 진단을 받는 경우도 흔하다.

이 교수는 “혈액암의 공통적 초기 증상인 빈혈, 피로, 출혈 등은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쉽다”면서 “혈액암은 항암제에 잘 반응하기 때문에 초기에 발견해 항암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한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