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30일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린 ‘열대우림 월드뮤직페스티벌’을 취재하러 갔다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영국 라디오 방송의 한 프리랜서 여기자 아네트(58)를 만났습니다. 이 의욕적인 여기자는 제게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은 뒤 “이번에 참가하는 뮤지션 중 한국팀 팔산대가 유독 눈길을 끈다”며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팔산대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 단장이 이끄는, 샤머니즘 의식을 판소리를 통해 구현하는 전통 가무팀입니다.

전날(27일) 축하 연회장에서 맛보기로 잠깐 선보였던 팔산대 무대에 감명 받은 아네트를 비롯한 외국 기자들은 29일 예정된 기자회견에 잔뜩 기대를 안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도 타국에서 만난 한국 밴드의 위상에 기분이 들떠 김 단장에게 다가가 따로 인터뷰를 잡자고 약속까지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9일 기자회견 때 김 단장은 보이지 않고 이 그룹의 멤버이자 통역을 담당하는 여성 장구잡이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재일교포 3세인 이 여성은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팀 소개 시간에는 마치 책자에 적어놓은 영문처럼 완벽한 문장을 구사해 좌중의 시선을 끌기에도 충분했습니다. 7개 팀이 참석한 기자회견이 중반을 넘기면서 기자들의 질문은 ‘팔산대’에 쏠렸습니다. ‘긴 드레스를 입고 표현하는 춤이 샤머니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부터 질문이 시작되자, 책자처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던 이 멤버는 뭔가를 조금 설명하다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급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듣지 못한 외국 기자들은 그녀에게 집중포화식으로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지자, 그녀는 “그가 왔어야 하는데(He was there)…” 하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열정적인 아네트는 회견이 끝난 후 기자에게 “김 단장이 왜 안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김 단장의 불출석 이유로 여성 멤버는 “아프다”고만 전했습니다. 그리고 1시간 뒤 점심 식사 자리에서 ‘한국어’를 쓰는 그룹 중 팔산대 멤버인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김 단장의 병에 대해 물었더니, “아픈 건 아니고, 여행 피로로 잠시 힘들어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수많은 외국 기자가 모처럼 한국 밴드의 독창적인 음악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 단장의 여행 피로가 ‘한국 문화의 가치’를 드높일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날 함께 참석한 사라왁 뮤지션들은 전통 음악인 ‘사페’가 사라질 위기를 막는 보도자료를 각국 기자들 손에 일일이 건네줬는데, 정작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온 한국의 밴드는 아무런 해명도, 적극적 홍보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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