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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광동의 사십계단의 애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였던 리처드 위트컴(1894∼1982) 유엔군 부산지역 군수사령관을 떠올린다. 6·25전쟁의 숨은 공로자였던 위트컴 장군은 전역한 뒤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수많은 전쟁고아를 돌봤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대부’ ‘전쟁과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1953년부터 유엔군 군수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역전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부산지역의 재건사업과 병원·고아원 건립 등에 헌신했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6·25전쟁 중 크고 작은 화재에 시달렸던 부산 시민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사십계단 위쪽 영주동, 보수동 등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피란민들의 피해가 컸다. 피란민들은 옛 부산역 부근에 있던 사십계단 위쪽에 나무판자, 기름종이, 종이박스, 가마니, 양철로 지은 임시 판잣집을 만들어 살았다. 전국에서 몰려던 피란민들로 영주동 산비탈 일대 판자촌은 순식간에 4만여 채로 불어났다.

작고한 원로 소설가 윤정규의 ‘불타는 화염’을 보면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영주동 산비탈 판잣집에서 시작됐고, 장장 14시간이나 번지고 번져 부산 번화가였던 사십계단 부근과 동광동, 부산역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당시 경찰국장이었던 김모가 산비탈의 판잣집을 소탕할 좋은 기회랍시고 소방관들로 하여금 진화작업을 중단케 했고, 그 사이 불은 바람을 타고 진화가 불가능한 대화재로 커져버린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미군 기름종이로 만든 판잣집 지붕은 불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삽시간에 대화마가 부산 시내를 덮쳤다. 피란민들이 아픔과 설움 속에서 구호물자를 내다 팔던 사십계단의 뒤편 축대에는 아직까지 부산역전 대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화재로 29명의 사상자와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부산 중심가는 폐허를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위트컴 장군은 군수물자를 풀어 집을 잃은 이재민 3만여 명에게 잠을 잘 천막과 음식을 나눠줬다. 당시는 겨울이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재민들은 미군이 주는 군수물자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위트컴 장군은 또한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지 165㎡(50만 평)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부대원 월급 1% 기부운동을 벌여 메리놀병원 신축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전쟁은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