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이 빚은 ‘색깔혁명’ 그 자체가 창조적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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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어스 / 필립 볼 지음, 서동춘 옮김 / 살림

과학의 영역인 화학과 예술의 영역인 그림. 그다지 관계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분야의 영역이 만나는 지점이 ‘색깔’이다. 화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안료의 개발은 일찍이 자연에서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색을 창조해냈다. 자연 상태의 재료에서 얻을 수밖에 없었던 색을 화학적 조성을 통해 만들어냄으로써 ‘색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색으로 화가들은 다양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이 책이 풍성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예술로서의 그림과 과학으로서의 화학이 만나는 지점과 그 성취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 분야의 이름난 저술가. 과학자답게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논증을 통해 색채가 어떻게 미술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현재에 도달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책의 이곳저곳에서 회화사에서조차 색의 가치가 홀대받고 있다는 데 대해 곧잘 ‘흥분’한다.

사실 그의 주장대로 회화에서 색은 가장 중요한 도구임에도, 그 중요성이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가령 음악으로 치면 소위 명기(命器)라고 알려진 훌륭한 악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을 기꺼이 장인(匠人)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반해, 미술 쪽에서는 그림의 주요한 도구인 색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며 ‘예술을 과학과 별개’라고 한 미술사가 곰브리치와 ‘색채화학은 걸작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과학’이라고 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발언을 ‘속물근성’ 운운하며 ‘숨 막힐 정도로 무식하다’고 격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저자는 회화사에서 색이 받았던 평가와 대접을 설명해주는데, 색을 통해 회화사를 들여다보는 게 자못 흥미롭다. 색채에 대한 화가들의 태도는 시대마다 달랐다. 고대의 유럽에서는 색은 ‘과잉장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세상은 훌륭한 소묘만으로도 충분히 묘사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견에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동의했다. 색의 선택도 엄격했다. 안료를 혼합해 다른 색을 얻는 건 꽃을 꺾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색의 혼합은 곧 처녀성을 잃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가 자연을 최대한 정확하게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르려면 자연을 지배하는 수학적 규칙을 배워야 했다. 다빈치가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가 수학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그림의 지위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중세 이래로 그림은 손재주의 천한 기술로 취급받았다. 그림에서 수학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화가들은 진지한 지적 학문으로 대우받고 있는 기하학, 음악, 수사학의 인문학자들과 나란히 서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과학 혹은 수학은 해부학의 세밀한 소묘와 설계도의 정교한 선으로만 드러났다. 안료를 분쇄해 만든 색채에 대해서는 대단찮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19세기 들어서 색채를 만들어내는 화학자들은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당시 회화교육은 미학과 지성만큼이나 역학과 실용적 측면을 강조했다. 합성화학이 발달하고 자연 상태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색이 등장하면서 혼자 안료를 섞어 색을 만들어 스스로 화학자가 돼야 했던 화가들은 안료상 같은 숙달된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 나아가 지금은 화가들을 위한 새로운 색이란 큰 시장을 갖고 있는 산업적 화학공정의 일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저자는 이렇게 흙을 물감의 원재료로 사용하던 고대로부터 연금술사가 색을 만들던 중세, 그리고 원색의 풍부함을 즐기던 르네상스 시기, 화학적 결합을 통한 합성안료의 등장 등 시대에 따라 색과 그림이 결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사진 감광제와 대량복제를 위한 인쇄잉크 등의 개발과 발전 등도 빼놓지 않고 있다.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화학자들이 창조해낸 색깔이 단순히 그림을 구성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어떨 때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창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인 듯하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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