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투어 / 설혜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18세기 유럽에서는 어린 청년들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는 게 유행이었다. 종교분쟁이 잠잠해지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영국 상류층이 자녀들을 유럽대륙으로 보내 외국어와 세련된 매너와 예술적 취향 등을 배워오도록 했다. 소비나 향락이 아닌 ‘교육’을 앞세운 최초의 체계화된 여행. 그것을 ‘그랜드 투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여행이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였던 셈이다.

영국사를 전공한 저자는 당시 교사의 기록이나 여행지침서, 교육서, 신문 사설 등을 뒤져 당시의 그랜드 투어를 복원해냈다. 이를 통해 그랜드 투어의 역사는 물론이고, 평균 2∼3년이 걸렸다는 여행 일정이나 코스 등을 상세히 짚는다.

또 여행에 나선 당시의 청년들이 과연 어떤 것들에 열광했으며, 여행을 통해 어떤 것들을 얻을 수 있었는지 등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당시의 세태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그 중에서도 재미있게 읽힌다. 그랜드 투어를 떠난 이들은 대부분 이동용 책상과 목욕통까지 챙겨 들고 갔으며, 한 백작은 여행 중 사들인 물건까지 합쳐 귀국길에 가져온 가방의 숫자가 무려 878개에 달했단다. 여행지에서 바가지 요금에 여행자들이 분개했다는 기록을 보면 지금의 여행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해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교육적 목적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결과적으로 국경을 넘은 지성인의 교류로 이어졌으며 문화와 예술의 융합과 발전 등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그랜드 투어가 유럽연합(EU)과 같은 유럽의 동질성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으며, 여행으로 예술적 안목이 높아진 영국인들이 그림과 예술품을 사 모으면서 유럽의 건축과 예술을 바꿔나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여행 중 만난 철학자와 문인 등 당대 지성인들의 교류가 유럽의 계몽사상을 구축하거나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그랜드 투어를 떠난 여행자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유명 인사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시인 볼테르는 여행 중이던 에드워드 기번,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외에도 유럽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그랜드 투어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거나 자극을 받았다. 그랜드 투어를 마친 뒤 대문호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이란 고전을 남겼고,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랜드 투어의 일행으로 로마를 처음 방문한 이후 ‘로마제국 흥망사’를 집필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그가 동행교사로 그랜드 투어를 인솔하는 과정에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쓴 책이었다.

여행사적인 측면에서의 접근도 흥미롭다. 그랜드 투어가 시작되기 전에는 여행 곧 모험과 탐험의 과정이었다. 당시 여행은 곧 신대륙의 발견과 탐험쯤으로 정의됐다. 그러다 그랜드 투어가 시작되면서 여행은 소수의 선택된 특권층이 다양한 문화와 교양을 익히는 수업의 일환으로 간주됐다.

저자는 그랜드 투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로 여행이 소수의 특권에서 ‘대중의 여가’로 변모하며 훗날 ‘패키지투어’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까지를 쫓고 있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