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 / 쉬지린 지음, 송인재 옮김 / 글항아리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은 21세기 초에 와서 다시 부상했다. 그러나 부상한 것은 부강(부국강병)일 뿐 문명이 아니다.”

중국 화둥(華東)사범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근현대 중국 지식인의 사상세계를 연구한 책에서 최근 급부상한 중국의 세계적 위상이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은 19세기 중반부터 꿈꿔 왔던 부유한 강대국의 실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세계사는 우리에게 문명이 결여된 부강은 무서운 부강, 단명한 부강이고, 속빈 강정이자 영혼 없는 야만의 힘이라는 점을 일깨워 줄 뿐이란 것. 이는 현재의 중국이 과연 세계 속에서 문명적·담론적 경쟁력이 있는 도덕적 대국이 될 자질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21세기 중국에 필요한 지식인상을 제시하기 위한 연구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문제의식은 바로 ‘문명적 자각’이다. 19세기 말 옌푸(嚴復)가 진화론을 중국에 들여온 뒤 몇 년이 안 돼 중국 전역을 풍미했고 중국인의 새로운 세계관·가치관이 됐다. 진화론과 이를 인류사회에 적용한 사회다윈주의가 유행하면서 중국인들은 경쟁을 세계의 공리(公理)로 신봉했고, 경쟁을 통해서만 민족이 부흥하고 개인이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경쟁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부강이 국가적 목표로 추진돼 왔는데, 저자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식 사고가 ‘19세기와 20세기 교체기 및 20세기와 21세기 교체기 모두’에서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경쟁 분위기를 조장했다”고 비판한다.

가령 지난 2008년 중국에서 화제가 된 책인 ‘앵그리 차이나’의 저자들은 미국을 가장 주된 적으로 간주하며 중국은 현재 도광양회(韜光養晦·일부러 몸을 낮춰 상대방의 경계심을 늦춘 뒤 몰래 힘을 기른다는 뜻)를 해서는 안 되고 할 일은 하고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기에 서양에 대한 반항의 선봉에 선 것 같지만 서양의 강권 논리를 모방하고 ‘칼 들고 장사하기’를 선동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들도 서양인의 우등생이란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특히 경제성장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인 ‘중국 모델’류의 담론과 최근의 반계몽(반서구)적, 특수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을 ‘역사주의’라고 비판하며 중국이 ‘계몽’과 ‘문명’에 입각한 보편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활기를 띤 지식인 연구의 산물인 책의 키워드는 계몽과 지식인, 공공성, 문명으로 압축된다. 근현대 중국 지식인의 상황을 사회적 위상의 변화와 사상적 진로라는 측면에서 검토한 책에서 저자는 개혁개방으로 시장화된 중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로 공공성 구현과 중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 등을 들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중국 지식인의 담론과 위르겐 하버마스, 존 롤스, 찰스 테일러 등의 서양 정치철학 등을 동원한 저자의 연구는 비슷한 역사적 행로를 경험한 한국 사회와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