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복희누나’의 한 장면(2011. 11. 7∼2012. 5. 4 방송·월∼금 130부작). 문화일보 자료사진

2010년 3월 하순, 사장으로 취임한 지 몇 달 후, 부사장이 애로사항이 있다며 찾아왔다. “제가 부사장이 되기 전 TV제작본부장으로 있어서 이 사항을 잘 알기에 이 문제를 사장님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작가들 원고료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본부장 선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이기에 고심 끝에 내게 왔음이 분명했다. “이금림 작가와 원고료 정산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지급금의 60%가 미회수 상태입니다.” 찬찬히 들어보니 발단은 2008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종합편성채널 출범을 앞두고 공중파 방송사 간에 일찌감치 드라마 작가 확보에 비상이 걸렸던 모양이다. 굵직한 작가들과 미리 작품 계약을 맺으면서 선급금을 지급했고, 그중 이금림 작가도 포함됐다.

이후 계약대로 2009년 1월, 저녁 일일드라마 ‘집으로 가는 길’ 집필에 들어갔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이 작가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고 급기야 다른 작가가 투입돼 그 드라마를 쓰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럼 선급금을 돌려받아야 할 상황이 됐군요.” “네. 그중 30%는 돌려줄 여력이 됐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라 나머지 돈을 바로 줄 상황이 안 된 겁니다. 게다가 작가 확보를 지시한 사장이 교체되면서 긴급 회수 상황이 됐습니다. 작품에 돌입한 이 작가는 회수 대상이 아닌 도중 하차 경우인데도 워낙 목돈이라 빠른 시일 안에 변제가 힘든 모양입니다.”

상황 파악은 했으니 순리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조용히 이금림 작가의 평판을 모아 보니 탄탄한 필력을 지닌 원로급 작가로 ‘푸른 안개’ ‘은실이’ 등 깊이 있는 정통 드라마에 능하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인품이나 실력이나 일부러 원고료 회수를 미룰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작가의 아들이 KBS 보도국 경제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결국 작가 집에 대한 가압류가 직원 집을 압류한 거나 매한가지였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던 작가입니다. 그리고 자식 같은 내 직원의 일인데 믿어 줘야죠. 만약에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두 사람을 위해 사장으로서 그 책임을 감수할 테니 기다려 봅시다.”

압류 조치를 풀자 얼마 후 이 작가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아직도 병색이 남아 있는 얼굴의 이 작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고, 그 진심과 진실이 은은히 묻어났다. 마음의 짐을 던 덕분인지 이 작가의 건강은 의외로 빨리 회복됐고, 조만간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거라 전해 왔다.

완쾌가 안 된 이 작가에게 저녁 일일극보다 아침드라마가 오히려 맞겠다는 의견들이었다. 하지만 아침드라마를 제안받은 이 작가는 또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요즘 아침드라마 대부분이 소위 막장드라마들입니다. 저는 그런 드라마를 쓰지 않는데 제 드라마로 시청률을 올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시청률에 연연해하지 말고 이 작가님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하던 이 작가의 얼굴이 내 말 한마디에 금방 환해졌다.

2년 반 만에 ‘TV소설’로 KBS 아침드라마가 부활하는 것이니 다른 막장드라마와 차별화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어려운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 한복희의 이야기로 지방 양조장에서의 애환, 고부갈등, 서울에서의 야학, 옷감 공장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내용이었다. 예상외로 시청률이 차츰 오르면서 ‘TV소설’만의 분명한 색깔로 다른 방송사에 뒤지지 않는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이 작가가 그동안 고마움의 뜻으로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는 드라마국장과 연출 PD도 배석했다.

“이 작가님, 10회만 더 써주실 수 없을까요? 다음 작품 때문에 연장이 필요합니다.”

드라마국장의 부탁에 이 작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했다.

“저도 그렇게 해드리면 좋겠지만, 드라마를 시작하면 거의 잠을 못 자고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많이 힘듭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니 드라마국장의 상황을 알면서도 이 작가에게 힘을 보태며 내가 정리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극구 사양하는 이 작가의 만류에도 저녁식사를 내가 대접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 이 작가로부터 뜻밖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어제 식사 감사했습니다. 돌아와 고심해 보니 제가 힘들더라도 10회 연장을 해드리는 게 도리일 듯합니다.’ 드라마국장에게 메시지를 전하니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복희 누나’의 종방연이 열리던 자리에서 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드라마로, 그것도 2TV에 ‘복희 누나’를 편성한다고 했을 때, 김 사장님께서 시청률에 전혀 구애받지 말고 ‘TV소설’ 같은 드라마 집필을 원한다는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집필을 거부했을 겁니다. ‘복희 누나’는 아침드라마에서도 불륜, 출생비밀 등을 말끔히 빼버려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사례라고 자부합니다.” 공감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작가의 진심어린 인사말에 내 가슴에도 뭉클한 보람이 무게를 더했다.

내가 드라마 작가를 직접 대면하는 기회가 흔치 않고, 이금림 작가와 평소 친밀한 사이도 아닌 마당에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갈등을 봉합해 좋은 결과를 낳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바른 이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과 함께, 사람의 향기는 끝없이 퍼져 나간다는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글귀가 새삼 떠올랐다.

전 KBS 사장

◆ 다음 회는 ‘공주의 남자’로 이어집니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인규(오른쪽) 전 KBS 사장과 이금림 작가가 지난 6일 ‘복희누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