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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취임 직후 2009년 말, 후년도 업무계획을 세우면서 드라마국에 제안사항이 하나 떠올랐다. “드라마국장! 내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인데, 예전에 방송됐던 ‘전우’ 같은 드라마 어떤가?” “네. 사장님! 그런데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6월 방송을 위해서는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드라마는 사실 돈이 많이 듭니다. 근데다 통상적으로 시청률이 얼마 안 나옵니다.” “물론 그런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런 전쟁드라마는 공영방송이 꼭 해야 되는 드라마 아닌가! 추진해 보지.”

그렇게 특별기획드라마가 하나 탄생하게 됐다. ‘전우’는 1975년 한국전쟁 발발 25주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1983년에 동명으로 1차 리메이크됐다. 그리고 이번이 2차 리메이크인 셈이었다. 스토리는 1950년 10월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 압록강까지 갔다가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물러나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전쟁의 활약상과 참상을 20부작으로 방송할 예정이었다.

방송 전 몇몇 신문에서는 1970년대 전쟁드라마 리메이크가 지극히 반공적인 드라마가 될 공산이 크다며 ‘전우’를 미리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전우’는 흑백논리에 의한 이념 편 가르기가 아닌 전장 속에 꽃피는 전우애에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러브스토리가 애초의 제작의도였다. 특히 국군 1분대 분대장 이현중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 최수종 씨는 주인공을 맡아 ‘전우’에 큰 힘을 실었다. 낙오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또 포로수용소로 찾아 들어가는 인간미 넘치는 인물을 그리기에 제격이었다.

보통 전쟁드라마의 주연은 서로 피하려고 한다. 무거운 철모를 쓰고, 총 들고 쉼 없이 뛰며 구른다. 실제로 최수종 씨가 ‘전우’를 찍으며 몸무게가 8㎏이 빠졌다고 내게 직접 밝힐 정도로 만만치 않은 배역이었다. 6월 9일 KBS 신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전우’ 제작발표회에서 그 고충을 토로했다. “대사를 외우는 것보다 포탄 심은 자리를 외우는 게 더 힘듭니다. 출연배우들 모두 촬영을 하면서 팔과 얼굴에 영광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혹자는 KBS 사극에 최수종 씨가 자주 등장하는 걸 문제로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수종 씨만큼 드라마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이 열정적인 배우도 드물뿐더러 대하사극이든 ‘전우’와 같은 전쟁드라마든 부상과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열연을 해줄 배우도 흔치 않다. 오히려 힘든 배역은 마다하고 드라마 출연 한 번으로 인기 급상승을 노리거나 광고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배우들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수종 씨에게 고맙고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빛이 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문득 최수종 씨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제가 출연했던 ‘첫사랑’이 최고시청률 60%를 기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최고의 드라마가 뭐였느냐고 묻는다면 ‘전우’라고 답할 겁니다.”

원체 전쟁드라마 제작이 힘든 줄 알았지만, 방송을 보면서도 고생하는 상황이 확연히 느껴졌다. 촬영이 한창이던 7월 초, 문경 세트장으로 향했다. 콘텐츠본부장, 드라마국장, 문경시장이 함께했다. 마침 국군과 북한군 특수경비단이 추격 신을 찍는 장면이었다. PD가 스피커를 들고 배우들을 독려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그 스피커를 넘겨줬다. 영문을 몰라 잠시 쳐다보니.

“사장님께서 레디고 한번 외쳐 주시죠.”

“레디… 고!” 우렁찬 내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며 전장이 재현됐다. 쉴 새 없이 터지는 공포탄 소리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공포탄이 한 발에 얼마나 하나?”

“예. 한 발에 2000원입니다.”

“수류탄은?” “한 4만∼5만 원 합니다.”

가만히 어림잡아 한 장면에 공포탄 500발만 터져도 환산하면 100만 원, 수류탄 20발만 터져도 100만 원. 그럼 저 한 장면에 200만 원이 하늘에서 연기로 피어오르는 셈이었다. 그렇게 다이내믹한 촬영이 끝났다. 이제 됐겠지 싶어 박수를 치는데.

“거기, 더 실감나게 굴러야지. 사장님까지 오셨는데. 다 보인다고. 자, 다시 찍읍시다. 각자 원위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만류했다.

“아니야. 된 거 같은데, 아주… 아주 잘됐어. 더운데 고생이잖아.”

“아이, 괜찮습니다. 고생은요.”

PD는 아마 배우들 힘들까 봐 만류하는 걸로 이해한 듯했다. 사실은 공포탄이 터질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주판알이 하나씩 올라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돈 그만 쓰라고.’ 내 안에서는 이 목소리가 맴맴 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스피커를 얼떨결에 잡고 “레디… 고!”를 외쳐야 했다. 내가 사장이 되기 전에는 공포탄 하나가 얼마인지 관심이나 있었던가. 경영과 직결되는 제작비를 고민하는 사장과 좋은 그림을 보여주려는 PD의 열정이 동상이몽(同床異夢) 그 자체였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의식이 희박해져 간다. 전쟁이 일어나면 생각지도 못한 극한 상황까지 간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걸 보여줄 길이 없으니까 ‘전우’ 같은 드라마를 통해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전우’의 마지막 장면이 일품이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남북 상호간 피해에 초점이 맞춰지는 듯해서 우려가 되던 찰나에 마지막 회 최수종 씨의 대사가 극의 매듭 역할을 했다.

“내가 전에 일본군에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난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나한테도 조국이 있다면, 나가 싸우라고 명령해줄 조국이 있다면 난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어느새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도 3년이 지나 올해로 정전 60주년의 해를 맞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봄이 와야 하지 않는가.전 KBS 사장

◆ 다음 회는 드라마 ‘복희누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