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물 신약(新藥) 처방권을 놓고 벌이는 의학계와 한의학계의 다툼이 거세지고 있다. 한의사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들에게 천연물 신약의 처방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의사들은 그런 한의사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물밑으로 처방권 사수를 위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천연물 신약은 어떤 것이기에 양 측이 이토록 처방권에 목을 매는 것일까. 천연물 신약 사업에 대한 전말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해묵은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의학계와 한의학계의 사정을 알아본다.

1. 천연물 신약이란

천연물 신약은 지난 2001년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당시 보건복지부 등 정부 관계부처는 의약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방편을 고심했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화학 합성물이나 생물학적 물질 등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은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지만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동·식물 등 순수 천연물을 이용한 의약품은 비교우위에 있다고 판단해, 이 분야를 집중 육성할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는 이런 계획 하에 만들어진 의약품을 ‘천연물 신약’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고 당시 “10년간 56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세계 신약개발국 7위권에 진입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당시 생겨난 천연물 신약이란 개념은 양·한방 개념을 넘어선 것이었고, 논란도 없었다. 인삼과 상백피, 녹용 등은 한의학 쪽에 가까운 천연물로, 버드나무 추출 성분인 아스피린이나 푸른곰팡이에서 나온 페니실린은 양의학 쪽에 가까운 천연물로 볼 수 있다.

2. 왜 문제가 됐나

천연물 신약은 일정 정도 한의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2001년과 2006년 제1, 2차 천연물 신약 연구개발 촉진 계획을 수립하면서 공공연하게 ‘전통 한의학 지식 분야’, ‘우리 민족 전통의 우수한 의약지식’ 등을 활용한다는 표현을 써왔다. 일반 신약 개발 단계에서 거쳐야 할 독성검사 절차의 경우도 ‘오랜 기간 (한의학 분야에서) 써 왔다’는 이유로 면제되는 혜택을 받았다.

그렇다고 천연물 신약이 오롯이 한의학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천연물의 성분을 분석하고 효능이 있는 중요 성분을 추출한 부분은 양의학에 기댄 바가 크다. 천연물신약은 양·한방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개발된 조인스정과 스티렌정, 모티리톤정, 신바로캡슐, 레일라정 등 천연물 신약 7종은 현재 제약사에 의해 전문의약품으로 허가가 나 의사들만 처방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제약사는 자신들이 더 이익을 볼 수 있는 전문의약품 시장으로 의약품 허가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처방권한이 없는 한의사들은 관련 집회를 여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3. 한방 측 주장은

한의사들은 천연물 신약이 주로 한약 재료와 한의학적 처방을 활용해 개발된 의약품인 만큼 자신들이 처방권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의학계는 “스티렌정(동아제약)에 쓰인 애엽(쑥), 모티리톤정(동아제약)에 쓰인 견우자(나팔꽃 씨) 등의 재료는 이미 한의학에서 각각 위염과 소화불량에 효능이 좋다고 밝힌 것들”이라며 “이를 차용해 캡슐로 약을 만든 후 한의사들은 처방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의사들은 또한 신바로캡슐(녹십자)과 레일라정(한국피엠지제약)의 경우는 아예 조제방식까지 한방의 것을 따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의학계는 “신바로캡슐은 자생한방병원의 골관절염 치료제 ‘청파전’과 레일라정은 배원식 한의사의 골관절염 치료제 ‘활맥모과주’와 재료부터 조제하는 방식까지 닮았다”고 말한다. 더욱이 한의사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과학적이지 않다고 폄훼했던 의사들이 도리어 자신들이 쓰던 약재를 이용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한의사들은 “견우자의 경우 성질이 강해 체질에 맞지 않은 사람이 먹을 경우 큰 탈이 날 수 있다”며 “이를 잘 모르는 의사들이 처방을 할 경우 문제가 생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4. 양방 측 주장은

의사들은 대부분의 의약품이 결국은 천연물로부터 만들어진 것인데, 한의사들이 천연물로 만들어진 의약품을 모두 자신들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의학계는 “아스피린은 버드나무에서, 탁솔(항암제)은 주목나무에서, 아르테미시닌(항암제)은 개똥쑥에서 추출한 의약품”이라며 “이런 약들이 단순히 천연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의학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의사들은 또 “천연물에서 효능이 있는 성분을 분석해 추출하고 이를 임상실험을 통해 밝히는 과정은 모두 의학적 방식”이라며 “중요한 것은 약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한약적 특성을 잘 몰라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한의사들의 주장과 관련, 의사들은 “임상을 통해 약의 적정량과 효능에 대해서는 충분히 연구가 돼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5. 한방·양방 움직임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곳은 한의사 측이다. 한방 쪽에서는 천연물 신약과 관련해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이번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따로 ‘대한한의사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한 상태다. 비대위를 중심으로 한의사 1000여 명은 지난 10월 1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를 실시 중이던 식품의약품안전청 앞에 모여 정부의 천연물신약 사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또 같은 달 24일에는 국회 앞에서 3000명의 한의사들이 집단 휴업을 한 뒤 모여 집회를 열고, 사업 백지화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기도 했다.

한의학계는 설상가상으로 첩약보험 문제까지 겹쳐, 대처를 잘하지 못했다며 한의사들이 한의협 사무실을 점거하고 김정곤 협회장의 퇴진을 논의하는 등 내홍을 겪고 있다. 이에 비해 양방 쪽은 조용한 가운데 천연물 신약 처방권을 지키는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의협은 지난 5월 한의사들의 천연물 신약 처방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복지부에 의뢰해 놓은 상태다. 정부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의사의 천연물 신약 처방권을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6. 천연물 신약 이면에는

한의학계가 천연물 신약의 의사 단독 처방권을 두고 격렬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져올 후폭풍이 너무도 거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발을 마치고 허가가 된 천연물 신약은 7종에 불과하다. 이 7종의 천연물 신약을 통해 한의학계가 입는 타격은 크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현재 60여 종에 이르는 천연물 신약이 연구 개발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산업이 성장한다면 그 수는 수백 종에 이를 수도 있다. 한약은 침술과 함께 한의학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기둥이다. 만약 한약 재료로 인한 신약 개발이 계속적으로 이뤄진다면 한의학은 자신의 기둥을 양방에 그대로 내놓는 꼴이 된다. 의료범위가 침해당할 뿐 아니라, 수익적 측면에서 많은 손해가 예상된다. 더욱이 이렇게 만든 천연물 신약에 대한 처방권마저 없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7. 어떻게 풀 것인가

천연물 신약을 놓고 한방과 양방이 벌이고 있는 기나긴 싸움은 결국 정부의 손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천연물 신약 갈등은 정부가 빌미를 제공한 바가 크다. 천연물 신약 연구 개발 단계에서 정부는 천연물 신약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 소유권과 처방권에 대한 논의도 전혀 없었다. 개발에만 신경을 쓰고 그 뒤처리는 신경 쓰지 않은 꼴이다. 더욱이 천연물 신약 개발 과정에서 전통 한의학적 지식을 끌어들여와 한의계의 기대감을 고조시켜 놓은 후 결과적으로 처방권은 의사에게만 쥐어줘 한의계의 반발이 심한 상태다.

하지만 정부는 천연물 신약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 8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현재까지 묵묵부답이다. 지난 5월 한의사들의 천연물 신약 처방권에 대한 의협이 의뢰한 유권해석에 대해서도 복지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정부가 천연물 신약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고, 한의학계와 의학계를 테이블로 끌고 오는 중재자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8. 한방·양방 다툼의 역사

천연물 신약 갈등 이전에도 한방과 양방의 다툼은 꾸준히 계속돼왔다. 특히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진단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갈등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지난 2004년 한방병원에서 CT촬영을 해도 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의협을 비롯한 의학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한 의료행위를 금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법원 판단이었지만 의협은 양방과 한방으로 나뉘어진 의료체계를 뒤집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2006년 서울고법에서 한방병원의 CT 사용이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이번에는 한의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양방과의 갈등 국면이 절정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한의학계가 감기환자 유치 홍보활동을 계획하자 내과의사들이 한약복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등 감정싸움이 일기도 했다. 최근에는 피부 질환에 사용하는 의료기기인 IPL을 사용한 한의사가 고발당하기도 했다. 현재 CT나 MRI 등 진단장비를 한의학계에서 쓰는 것이 불법으로 돼 있지만 한의학계는 한방진료에 맞게 특화된 진단기기를 개발해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9. 왜 대립 잦나

한방과 양방의 잦은 대립의 근본적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법적 제도적 미비점’을 꼽고 있다.

장규태 (한의학) 경희대 교수는 “의료법상 의사의 범주 안에 한의사도 포함돼 있지만 개별법별로 의사의 범주에 한의사가 포함되는지 등의 적용이 다르고, 의료행위와 한방의료 행위의 범주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모호해 여기서부터 다툼이 일어나게 됐다”고 지적했다. 결국 같은 일을, 다른 방식을 통해서 하고 있는 한방과 양방은 태생부터 갈등의 소지가 있는데, 제도적으로도 구분이 확실치 않아 대립이 잦다는 얘기다. 또한 ‘밥그릇’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라고 보는 측면도 많다.

10. 화합 비책은 없나

최근 서양 의료계를 중심으로 양방과 한방의 융합이 유행하고 있다. 미국의 의료학회에서 한의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다거나 한국의 한방병원으로 서양 의료진이 진료기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고, 이를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좋은 것은 갖다 쓴다’는 열린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방과 한방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오히려 갈등만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의료법과 제도상 모호한 구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합칠 것은 확실하게 합쳐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의료전문가는 “양·한방의 결합은 학문·임상적으로 큰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는 만큼 ‘양·한방 융합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민환·고서정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