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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뭔가?

새우 샐러드, 동해 피문어, 홍어찜과 돼지고기 수육, 방어회, 전어회무침, 조기구이, 김치찜이 나왔었다.

이번엔 아귀 간이란다. 맛보기 쉽지 않은 별미다. 뭐가 남았냐고 묻자 복국이나 김치찌개 중에 골라 밥 먹으란다. 산해진미, 진수성찬도 좋지만 아이고 이건 좀 너무하는 것 아니냐.

배가 부르면 그저 사양하거나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여기선 그럴 수가 없다. 전라도 김제의 지주 딸로 태어나 맛있는 것 밝히는 가풍 때문에 세상천지의 진미 별미 일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먹어보며 자란 탓으로 착착 혀에 감기는 감칠 난 맛의 요리를 만들어 내는 ‘복있는 집’ 권규화 여사의 내공 덕에 이미 용량은 넘쳤건만 욕심 많은 손은 식탁과 벌려진 입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고문이다. 행복하고 황홀한 고문이다.

가슴 먹먹하리만큼 오색단풍이 시리게 물든 서초구 우면산 자락엔 예술의전당이 점잖게 앉아 있고 널찍한 대공연장 주변의 붉게 잘 익은 감들을 탄성 지르며 바라보다가 내려와선 대로를 막바로 건너 골목 안으로 이삼십 발자국 걸어 들어가면 왼편에 쓰러져 가는 몰골의 작은 식당이 겨우 눈에 들어온다.

‘복있는 집.’ 점집 상호 같지만 밥집이다. 허름하다고 얕보다간 낭패 본다. 찌개류의 단품요리도 있으나 저녁엔 그저 제철요리코스 딱 한 가지뿐. 1인 5만 원부터인 고급요릿집. 단골들 대부분 이 집을 늦게 안 것을 분하게 여길 정도고 오는 손님들의 면면이 화려해서 기죽기 십상. 마치 노름판의 화투패처럼 이쪽저쪽에서 으스대며 명함을 들이대니 영락없는 강호무림의 용쟁호투. 방 한 칸밖에 없는 월매집 꼬라지의 밥집에 전직 국무총리 세 분이 우연히 제각기 오는 바람에 거시기하게 밥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섯다판엔 장땡이나 3·8광땡이 최고인 것처럼 화류계에선 주색잡기며 미식 감별에 두루 능한 ‘한량’이 최고다. 국무총리며 재벌회장도 울고 갈 끗발의 왕손님들이 몇몇 있다만 그중에서도 국보급 소리꾼들이 으뜸인 듯싶다.

얼마 전에도 테너 박인수(74) 선생이 저명한 교수 제자들과 복있는 집을 뒤집어 놓고 가셨단다. 박인수 선생이 누구인가. 가수 중의 가수고 한량 중의 한량이다. 단연 우리나라 서양 소리의 대명사다. 일찍 줄리아드에서 마리아 칼라스에게 사사한 후 오페라가수로 잘 나가다가 한국 음식 유혹을 못 참고 귀국해 서울음대 교수로 재직했었다. 지금은 방배동 백석예술대 석좌교수. 그러나 대중가요 가수 이동원과 ‘향수’란 노래를 불렀다가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는 희한한 코미디의 주연이 된 적도 있었다. 박 선생은 워낙 권위주의나 허세하고는 먼 분이라 밥 먹고 술 먹다 흥이 나면 장소 불문하고 오페라의 아리아를 불러 재끼는데 여기 복있는 집도 그런 즉석무대 중의 하나다. 그 큰 성량으로 가곡을 부르니 이 누추한 집이 들썩거리는 것은 당연지사일 테고.

왕손님 중엔 판소리꾼도 많다. 명창 채수정도 그 중 한 사람. 웬만한 사내 열을 상대하고도 남을 듬직한 체구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때문에 얻어진 판소리계의 마리아 칼라스란 별명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소리꾼이다. 판소리로 대한민국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방일영 국악대상도 수상한 한국 국악계의 미래를 지고 갈 명창 중의 명창. 그녀가 느릿느릿 진양조로 사시사철 망부석이 되어 울고 있는 춘향의 처절한 심정을 천연덕스럽게 목놓아 울면 밥집 안의 좌중도 덩달아 가슴을 후벼 판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가’ 중 두 사람이 뜨겁게 애정을 나누는 장면에 이르러선 장단이 중중모리에서 자진모리로 빨라진다. 숨넘어갈 듯 한껏 고조된 흥으로 소리한다. 손님들도 덩달아 어깨가 들썩이며 사랑의 감정에 같이 흠뻑 빠져든다. 그런 곳이 여기 복있는 집. 장안의 한량 중 겨뤄보고 싶은 이 있으면 이리로 오시라. 유흥비 넉넉히 챙겨 오는 것 잊지 마시고.

나는 지금 우면산 아래 방배동에 살고 있다.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정착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동네의 자랑을 늘어놓고 싶다.

방배동 삼익아파트나 전라북도 출신의 대학생들 기숙사인 전북장학숙 주변엔 참으로 감이 많이 열렸다. 웬일인지 올핸 더욱 풍년이다. 홍시가 새벽안개 자욱한 골목에서 가로등 불빛 받으며 부지런한 행인들에게 제일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복많이 받으시라고.’ 그리고 가게 중 제일 먼저 떡집의 불이 켜지면 비로소 방배동의 새날이 열린다.

삼익아파트 입구의 떡집 ‘떡향기’엔 갖은 종류의 떡들을 새벽부터 직접 빚는다. 인절미, 송편, 바람떡, 절편, 쑥굴레, 무지개떡과 이 집이 자랑하는 두텁떡 등 세기도 힘든 다양한 떡들을 만들어 낸다. 난 그중에 절편을 좋아한다. 멋쟁이 떡이기 때문이다. 흰 절편, 파란 절편, 분홍 절편 등 색깔도 예쁘지만 무엇보다도 떡살로 찍어낸 다양한 문양의 무늬가 멋있다. 예전엔 혼숫감으로 떡살을 꼭 챙길 정도로 친정집 안방 살림의 품위를 가늠하는 필수 혼수품이었다. 또한 한 켜 한 켜 켜를 이뤄 지층처럼 보이는 시루떡도 좋아한다. 오랜 시간 동안 따뜻한 마음들이 차곡차곡 얹혀진 것 같다. 잔치 때 떡을 만들어 돌리는 풍습이 있어서인지 방배동은 새벽마다 잔치가 벌어지는 것 같다.

방배동 가게들마다 아침 기지개를 켤 때쯤 ‘예림아트’도 문을 연다. 표구와 액자 전문집이다. 예림아트 김춘한 사장은 1987년 내 작업실이 논현동에 있을 때 오랫동안 몸담았던 표구사에서 막 분가해 그 동네에 자신의 점포를 열었다. 그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내가 곧 방배동으로 이사 오자 김 사장도 나를 따라 곧장 같이 왔다. 내 그림의 모든 액자를 만들어 준다. 25년째 동고동락하고 있다. 운명이다. 남은 생애 내내 역시 그럴 것이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그림 보는 눈이 예리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면 김 사장에게 귀중한 비평을 부탁하고 있다. 뛰어난 장인이자 친구이자 내 예술의 조언자다.

그리고 이웃의 ‘원경그릇’이 환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우리 도자기로 만든 그릇가게다. 서양그릇같이 기교나 인공미가 아니다. 중국처럼 거만하지도, 일본처럼 신경질적이지도 않다. 간결하고 질박하다. 그런데 더욱 아름답고 현대적이다. 시간이 갈수록 싫증은커녕 사랑스러움이 더해진다. 놀랍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이 우리의 청자요 분청이며 백자다.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도자기 민족으로서의 DNA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정작 우리만 우리를 몰라준다. 라면이나 김치쪼가리 같은 하찮은 음식이라도 제대로 된 생활자기에 담으면 보는 느낌과 맛은 전혀 달라진다. 이웃 나라 일본에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도 도자기 그릇에 국수를 말아 내놓는다. 플라스틱 용기를 천박하다며 경멸한다. 그것이 문화고 자부심이다. ‘종갓집 새댁’ 같은 아름답고 깔끔하고 귀엽고 대견하고 애틋한 모습의 우리 명품자기들이 그득한 원경그릇은 방배동 여인들의 자존심이다.

원경그릇 건너엔 ‘유락칼국수’란 장안에 꽤 알려진 칼국수집이 있다. 그런데 원래는 유락분식이었고 흔한 분식집처럼 이것저것 잡다한 메뉴가 많았었다. 장사도 시원찮았다. 그러다가 궁리 끝에 18년 전 유락칼국수로 상호를 변경하고 메뉴도 한 종류만 집중해서 개발했는데 그게 대 히트를 쳤다. 점심시간에는 으레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아야 할 정도로 대박이 났다. 그런데 인생이란 참으로 얄궂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고 이제 좀 호강하려나 했더니 덜컥 사장님께서 병이 드셨다. 결국 부귀영화도 누려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지금은 사모님만 홀로 남아 여전히 맛있는 칼국수를 만들며 하늘에 계신 사장님을 대신해 어려운 이웃들도 도우면서 힘껏 사신다.

어떤 곳이 살기 좋은 동네일까? 애매한 질문이다. 기준이 모호하다. 언젠가 모 언론사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서슴없이 ‘탁구장’이 있는 동네가 살기 좋은 동네라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탁구장은 찾으려 하면 사실 쉽지 않다. 여건이 은근히 까다롭다. 화려한 유흥가나 인적이 드문 부촌에는 탁구장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운동이다 보니 단란한 가정들이 많아야 하고 민망스러운 업소들이 주변에 없어야 한다. 편안하고 소박하고 적당한 여유를 갖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 간혹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사람냄새 물씬 나는 곳에 비로소 탁구장이 생긴다. 방배역 근처엔 전 국가대표 이계선 관장이 최선을 다해 지도하는 국가대표급 탁구장이 있다.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의 첫째아들 양녕대군과 유부녀 ‘어리’와의 러브스토리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8세가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스스로 내놓으며 이룬 헌신적이고 순애보적인 사랑은 아니었지만 세자폐위를 감수할 정도로 대단히 파격적이고 낭만적인 사건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양녕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인 동생 충녕(세종대왕) 사이에 낀 둘째 효령은 애시당초 세속적인 권력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그저 책이나 읽고 절간에서 북이나 두드렸다. 불심과 효심이 깊었고 늘 미소 짓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술도 못 마셨다. 한량의 기질이라곤 전혀 없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동생이 만든 한글로 국역한 이도 효령이었다. 그런 인품 덕인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들을 거치며 무려 9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당시로서는 놀랍다. 양녕은 69세까지 살았고 세종은 54세에 승천했다. 효령대군의 능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청권사가 방배역 4번 출구 앞에 오롯이 자리하여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무래기 한 무더기가 와글거린다. 어린애들 보기가 예전 같지 않은 요즘 저리 많은 꼬마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도 반갑다. ‘저 고사리들이 언제 커서 돈 벌고 시집 장가 갈까?’ 흐뭇한 걱정이 든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방배동 영유유치원 아이들이 줄 맞춰 짝과 손잡고 동네를 탐방한다.

오늘은 방배역 미스터피자 본사 앞에서 뭔가 들여다보며 재잘거린다. 건물 안에 걸린 그림들과 벽화를 보고 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참으로 앙증맞다. 꼬마들 표정이 한결같이 밝은 걸 보니 그림 수준이 만족스러운가 보다. 미스터피자는 이미 국내 1위를 넘었고 세계 1위를 향해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토종 브랜드. 회사에선 감사의 선물로 당대 최고의 미술작품들을 상설전시하고는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고객과 주민을 위한 갤러리이다. 아름다운 기부며 쉽지 않은 발상이다.

살다 보면 ‘저 사람한텐 도저히 안 되겠어!’하고 등급이 다름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되는 특출난 절대강자들이 간혹 있다. 미스터피자가 속해 있는 MPK그룹 정우현 회장이 그런 강자고 진정한 ‘꾼’이다. 경남 하동 산골의 팔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지금의 신화적 기업인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좌충우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모한 도전과 성공에의 의지는 기상천외하고 가슴 찡한 사연까지 통쾌와 감동이 뒤범벅된다. 그러면서도 늘 삶의 전 과정은 정성과 정직의 반복이었다. 매일 시(詩)를 읽고 누구보다도 술이 세며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조강지처가 느닷없이 주름을 펴고 성형을 해서 나타난다면 난 배신감을 느낄 것 같다. 같이 살아온 세월의 흔적도 지워졌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강남은 보톡스 주사 맞은 얼굴 같지만 방배동은 비교적 세월의 매력을 간직한 동네다. 노랗게 낙엽이 쌓여간다. 방배중학교 인근 주민인 조용필이 불러서인지 쓸쓸함과 위로가 교차하는 ‘그 겨울의 찻집’이 유독 정겹게 들린다. 따뜻한 차 한잔하고 싶다. “예쁜아, 차 한잔할까?” 예쁜 찻집, 예쁜 사람이 많은 곳, 방배동이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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