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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어느 날, 나는 인사동 성화빌딩 1층 가나화랑 접견실에서 초조히 앉아 있었다. 1톤 용달로 방금 전 내 그림들을 싣고 와 화랑벽에 가지런히 세워 놓았다. 작업실에서 볼 때완 달리 그림들이 왠지 초라해 보였다. 전날 화랑에서 내가 자료로 보낸 사진으론 잘 모르겠다며 그림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화실에서 화랑까지 갈 수는 있었는데 돌아올 용달비가 조금 모자랐다. 수입이 거의 없을 때였다. 작은 돈이라 친구한테 융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화랑에서 퇴짜를 놓으면 인사동 골목에 다 버리고 올 작정이었다. 다음을 기약할 여유도 없었고 그만큼 절박했다.

유학 가 있던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상황은 안 좋았다. 경제적으로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선 것이 고액 과외. 친구인 영어강사 오성식이가 주선해 주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보수를 받고 미술교습에 나서 1년 반 만에 집안의 모든 빚을 갚았다.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들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자괴감은 커져갔다. 결국 교습을 때려치웠다. 다시 화폭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듯 그림을 그렸다. ‘화가로서 먹고살 거야!’ 그것이 내 결심이었다. 그러곤 다시 급속히 궁핍한 생활로 돌아갔다. 궁리 끝에 용기를 내서 내 그림들의 자료를 갖고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던 화랑인 인사동 가나화랑의 문을 두드렸었다.

다행히 화랑은 날 전속작가로 받아들였다. 가지고 간 내 그림 전부도 인수했다. 호당 가격이 2만 원 남짓밖에 안 되는 신인화가지만 어엿한 전업작가로서 첫발이었다. 화랑서 매달 주는 지원금은 50만 원부터 시작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날 후원했다. 25년 가까운 세월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인사동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필방인 구하산방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드나들면서였다. 뻔질나게 찾아가 붓을 사갔고 조계사 앞에 있던 동덕미술관이나 문헌화랑, 경미화랑의 전람회들을 관람했었다.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구하산방의 할아버지 사장님은 날 위해 도록들을 모아 주셨고 자신이 다니던 성균관에 같이 가서 제례를 지내자고 종용하셨다. 약주를 좋아한, 충청도 홍성이 고향인 사장님은 날 데리고 정종대폿집에서 화단의 재미난 얘기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림 잘 그리라고 좋은 벼루와 전각들을 선물로 내게 주셨었다. 유학 가면서 산나리꽃을 그린 그림을 선물로 드리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너무 약주를 많이 드셨다.

지금 나는 가을날 오후에 예전 영빈가든 자리였던 쌈지길 옥상에서 인사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스와 유사한 형태의 쌈지길은 동선이 그곳보다 오히려 편안했다. 규모가 작기도 했고 따뜻한 글자체로 곳곳에 쓰여진 표지판 붓글씨나 민화풍의 그림들이 날 행복하게 했기 때문이다. 쌈지길의 표지판 글씨나 그림들은 모두 이진경이라는 젊은 화가의 작품. 대단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

쌈지길 입구의 아원공방은 딸 부잣집 여섯 자매가 알콩달콩 꾸려가고 있다고 귀띔해준 이는 산악가이며 소설가이면서 한옥 와인바인 로마네콩티의 주인 박인식 선생. 박 선생은 여태 휴대전화, 컴퓨터, TV, 운전면허, 신용카드가 없는 괴짜다. 사람 좋은 그는 일년의 절반은 서울서, 나머지 절반은 파리에서 사는 골수 낭만파. 그도 술이 징하다.

그가 파리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기내에서 배낭에 잔뜩 넣어간 포도주에 취해 장소를 착각하여 예쁜 스튜어디스를 붙잡고 노래를 시키자 마지못한 스튜어디스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우리가곡을 멋들어지게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는 일화는 참으로 흐뭇하다.

저 멀리 아라아트라는 휘장이 보인다. 처음 보는 이름이고 처음 보는 건물이다. 오윤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전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얼른 쌈지길 계단을 내려왔다. 가는 도중에 목인박물관이 보였다. 죽음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지만 화려하고 아기자기해 북촌이나 다른 많은 지역의 박물관 건립에 영감을 준 곳이다. 지상과 천상을 잇는 나무인형들이 재잘거리며 속삭이고 있었다.

전시 뒤풀이 장소로 유명한 부산식당도 같은 골목 안에 있다. 생태탕이며 두부부침, 밑반찬으로 나오는 콩나물 무침이나 양배추 삶은 것이 예전 맛 그대로 나오고 콩 몇 개 올려놓은 금방 지은 쌀밥도 변함이 없건만 4년 전 사장님은 돌아가셨다. 사모님이 대신해서 고생하고 계신다. 그냥 지나치기 뭐해 냉막걸리 한 통 주문해 호쾌하게 마셨다. 낮술이라 금방 취했다. 부산식당 앞 관훈미술관은 본래 산부인과. 그 자리에서 아이들도, 좋은 작품들도 숱하게 탄생했다.

아라아트의 개관전 중 하나로 오윤 추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오윤(1946∼1986)은 1980년대 우리 미술계 변혁의 한복판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던 작가였다. 소위 민중미술작가의 상징이다. 곱슬머리에 깡마른 몸매, 제비처럼 손짓 몸짓이 하늘하늘해 오제비란 별명도 얻었던 오윤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했다.

그의 부친 오영수는 단편소설만 고집했던 소설가. 영화화되어 신인인 고은아를 일약 스타로 올려놓은 ‘갯마을’이 그의 작품. 바닷가 마을 청상과부의 사랑과 애환을 그린 문예영화였다. 그런데 오영수와 오윤의 예술관은 현격하게 달랐다. 아버진 순수예술을 신봉했고 아들은 민중의 삶과 유리된 예술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시인 김지하는 오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김지하를 오영수는 못마땅해했다. 더군다나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사상계에 실렸을 때 오윤의 그림이 삽화로 곁들여져 후일 오윤은 쫓기는 신세가 됐고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소묘가 탁월했던 오윤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난 내가 그린 소묘뭉치를 들고 그가 잠시 기거하던 서대문미술학원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 만나진 못했고 그의 이어지는 떠돌이 생활과 투병으로 결국 사제의 인연은 이뤄지지 않았다.

간 경화증으로 고생하던 오윤은 1986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신명나게 판화작업에 몰두했다. 불현듯 생기가 돋은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신비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그해 초여름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대성황이었고 연장 전시와 순회 전시도 약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드가 빠진 TV처럼 그의 생애는 뚝 끊겼다. 전시 며칠 후인 7월5일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 그도 술을 너무 마셨다. 만약 오윤이 5년만 더 살았다면, 아니 2년만이라도 더 살았다면 우리미술은 어떻게 변했을까? 긴 한숨이 새어나온다.

화단의 신동엽, 춤추는 도깨비, 칼노래를 부르는 무당이라 불렸던 오윤을 누군가가 저승에서 불러내 한판 신나는 그의 춤판을 보고 싶다.

나는 민중미술작가들을 불편해했다. 성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거칠었다. 그들의 뒤풀이 장소는 부글부글 끓는 활화산 같았다. 화나면 화나는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날것의 상태로 드러냈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선홍색이 너무도 흥분된다며 꽃밭에 들어가선 용두질을 하고야마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솔직한 작가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근현대미술에서 1980년대의 민중미술 말고 자생한 것이 있었을까? 민중미술을 빼면 모두 다 수입한 것이다. 우리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만큼 민중미술의 가치는 탁월했지만 현실에선 외면받았었다.

개중엔 다른 시각도 있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사장은 우리미술의 보물이라며 민중미술을 열심히 수집하더니 200여 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해 화단을 놀라게 했다. 대단한 혜안이었다. 또 우리미술사의 대 사건이라 불리는 민중미술의 신호탄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1980년 11월 인사동 동산방에서 우여곡절 끝에 열렸다. 한국 미술사의 성지가 된 것이다.

부산식당에서 마신 막걸리가 좀처럼 깨질 않는다. 술도 깰 겸 모과차나 한 잔 하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했던 찻집 귀천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천상병(1930∼1993) 시인이 씨익 웃으며 인사동 골목 구멍가게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순진무구한 모습을 시인의 생전엔 흔히 볼 수 있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문초를 받아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고 생전에 유고시집이 나오는 등 수많은 일화와 기행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원래 천재였다. 일찍이 마산중학 시절 문예지에 시를 발표했고 서울상대 재학 중 시와 평론에 추천을 마친 최연소 문학 2관왕이었다. 뒤뚱뒤뚱한 걸음걸이와 들쑥날쑥한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던 시인 천상병은 희극배우 김희갑과 닮아 천희갑이라고도 불렸다.

1972년 친한 친구의 여동생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결혼한 시인은 63년간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부인 목순옥 여사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말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목 여사마저 재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시어 찻집 귀천은 조카가 맡아 예전 모습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 제일의 액자집인 청기와 화방 조귀래 사장은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술값을 도맡아 내기도 했다. 사실 조 사장은 술을 잘 못한다. 나는 낮술에 취해 넓지 않은 청기와 화방 의자에 앉아 졸기 일쑤였다. 그래도 싫은 기색이 없으셨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던데 미안한 마음에 선물이라며 화방의 간판을 내가 새로 만들어 달았다. 조 사장이 싫든 좋든 내 맘대로 만든 것이다. 지금도 걸려 있는 물고기 모양의 간판이다.

저평가된 명품 발굴로 유명한 골동품상 가야재의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민예품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 그중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병풍과 비녀. 우리집이 큰집이라 어른들이 임종하시는 모습을 집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돌아가시면 병풍을 쳤다. 병풍 이쪽은 산 자의 공간이고 병풍 너머는 죽은 자의 공간이었다. 병풍의 의미가 숙연했다. 비녀는 순결과 절제의 상징이랄까, ‘나는 임자 있는 몸이니 넘보지 말라’는 듯 육체의 문에 빗장을 지른 것이다. 단호하고 애틋한 의미다.

오늘날 인사동은 무슨 의미일까? 갯벌같이 시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진 곳, 또는 문화인들의 고향이나 해방구라며 예전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은 이젠 적다. 화상들이 즐겨찾던 노래주점 그라미의 김춘수 사장을 인사동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반갑다며 108년 된 이문설렁탕에 마주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림 보는 안목이 높기로 정평이 자자하고 배호 노래를 잘 부르는 노화랑 노승진 사장이 쓸쓸히 혼자 낙원상가 지하 일미식당에서 청국장으로 식사하는 걸 여러번 봤었다고 그는 전한다. 절친했던 화상 동료들이 인사동을 떠났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극심한 불황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인사동 터줏대감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화랑과 표구점들이 없어지고 싸구려 기념품점들만 난무하는 인사동은 제 소리를 못 내는 고장난 풍금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두 번이나 개인전을 열었던 인사아트센터엔 우리미술의 사망을 고하는 검은 조기(弔旗)가 무겁게 펄럭이고 있다. 곧 시행하려는 미술품 양도세 때문이다. 28억 원 정도의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만든 법이다. 누가 보든지 분명히 미술계의 심장을 향하는 독화살이다. 머지않아 우리 미술계는 심장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고꾸라질 것이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 묻고 싶다. 우리보다 백배도 더 커진 중국미술시장. 문화적 종속이 두렵다. 큰 비가 오려는 듯 먹구름이 심상치 않다. 인사동, 잔치는 끝났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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