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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 1952년 서울의 PX초상화부에서 같이 일했던 한 화가를 소설가 박완서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박 씨가 두툼한 화집을 한 권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 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끼고 다닌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 하고 같잖게 여겼다. 회상 속의 박 씨는 지금은 국민화가로 칭송받고 있는 박수근. 그와의 운명적 만남은 한 화가와 그 시대에 대해 증언하고픈 강렬한 욕구를 일으켰고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지만 결국 40세의 평범한 주부를 소설 쓰는 작가로 변신하게 했다. 화가 박수근과의 만남을 토대로 쓰여진 박완서의 처녀작 ‘나목’은 그렇게 탄생됐다.

박수근은 39세에 36만 환을 주고 동대문구 창신동에 판잣집을 구입했다. 최초의 자기집이었다. 처절한 고생의 대가였다. 이 세상에서 나만 집을 산 것 같이 기뻤다고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는 술회했다. 박수근은 창신동 집에서 10년을 살았고 그가 남긴 대부분의 그림은 그곳서 그렸다. 평생 가난에 쪼들려 산 그였다. 그가 창신동집 마루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그의 대작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몇 해 전 ‘빨래터’란 그의 작품은 경매에서 45억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 미술품 가격 중 제일 고가였다. 현재 박수근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가격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 속의 그림을 모두 합친다면 아마도 그 같은 판잣집 정도는 수백 채를 사고도 남았으리라. 그렇게 평가받는 이유는 진솔한 심성과 한국의 대지를 생생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51세에 간경화로 애틋한 생애를 마감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위대한 작품들은 참담한 삶과 병마와 싸우면서 헐값에 거의 사라졌다. 창신동 골목길에서 화가 박수근이 점잖게 미소 지으며 지금도 걸어나올 것 같다. 벌거벗은 나무와 여인이 그려진 황톳빛 그림을 옆구리에 낀 채로….

이양숙 선생님은 면목중학교 물상선생님. 우리 학교가 첫 부임지인 신참 선생님. 부산 가시내답게 말투며 성격이 억수로 화끈하고 귀여우셨다. 그러나 몸매는 호빵처럼 푸짐하셨다. 1973년의 어느 날, 같이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가자고 그러신다. 서울의 유일한 실내 스케이트장이었고 아주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우린 그다지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로맨틱한 얼음질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선생님의 심각한 엉덩방아로 모든 상황은 급박하게 돌변했다. 복숭아가 쩍 갈라진 것처럼 사정없이 가운데가 벌어진 바지며 민망스럽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분홍빛 내의. 오 부처님 하느님 맙소사, 우리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요? 혼비백산한 채 나는 옷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날의 굴욕을 선생님은 더욱 평생 잊지 못하실 것 같고. 참사 현장인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언제부터인가 대형쇼핑센터로 변했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근처엔 동덕여고가 있었다. 지금은 방배동으로 이사왔다. 동덕여고는 탁구로 유명했다. 당시 동덕여고 체육관엔 그 학교 출신의 국가대표 탁구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서울여상 탁구부와 쌍벽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970년대 초반 국가대표를 지낸 박미라, 나인숙 선수가 동덕여고 출신일 것이다. 그 시절은 탁구의 황금기.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 여자대표인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가 스카이 서브의 장립과 이질고무 라켓을 들고 나온 갈신애 선수의 중공을 물리치고 구기단체사상 첫 세계제패를 이룬 직후라 전국에 탁구장 붐이 일었다. 우리 할머니도 그때 부랴부랴 면목동에 탁구장을 만드셨다. 나도 거기서 일하다가 진짜 선수가 되어 중학교 땐 교내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동덕여고가 탁구는 잘 쳤지만 겨울교복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일제 때 징용 나온 아줌마들 같았다. 치마가 아니고 바지였는데 소시지 같이 생겼었다. 일본어인 ‘당꼬바지’ 또는 ‘고바지’라고 흔히 불렀었던 것 같다. 경기와 진명, 숙명, 사대부고, 계성, 수도여고도 비슷했다. 정신, 한양, 영란, 성신, 혜화, 풍문은 그저 그랬고 무학은 묘했다. 덕성, 송곡, 은광은 야했다. 혜원, 경희, 진선, 상명, 동명은 괜찮은 편이었고 이화와 창덕, 금란, 성심, 서울예고가 예뻤다. 물론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내 여동생과 딸이 동덕여고를 나왔다. 지금 교복은 그때완 다르다. 동덕여고 앞엔 여학생만 출입할 수 있는 분식집이 있었다. 그걸 모르고 나와 내 친구들이 그곳엘 들어갔더니 갑자기 분식집 안이 록콘서트장처럼 난리법석이 됐다. 우리가 귀엽다며. 그땐 몰랐다.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관심이 많다는걸…. 남자들이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여자들도 남자들을 좋아한다는 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1974년 8월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종점이 청량리였다. 땅굴 속으로 기다란 기차가 다니는 게 신기했다. 또한 짓궂은 애들은 그걸 이상한 쪽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아닌가. 한창 성(性)에 눈뜰 때였다. 지하철이 개통한 것을 합궁(合宮)에 비유하며 키득거렸다. 여자 선생님께 “선생님, 지하철빵 좀 드실래요?” 하면 애들은 깔깔거리기 시작했고 만약 여선생님께서 “맛있니?” 라고 하시면 애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자지러지고 말았다. 무슨 난리라도 났나 하고 옆 반의 선생님이 기웃거리실 정도였다. 당사자인 여선생님은 애들이 왜들 이러나 하고 어안이 벙벙하셨다. 어쩌면 알았지만 모른 체해 주신 것일지도 모르겠고. 그맘때는 본시 그런 것이니깐.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면목극장에서 ‘영자의 전성시대’란 영화를 봤다. 염복순이란 여배우가 식모, 버스차장, 공장직공, 바걸, 창녀로 전락하는 과정을 열연한 영화였다. 적나라한 성애묘사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송재호가 분한 때밀이 창수와의 목욕탕 장면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봐야 했다. 그런데 당시 수많은 영자들이 곤혹을 치렀다. ‘자’로 끝나는 영자는 일본식 이름. 그런 영자들이 놀림을 당했던 영자의 수난시대였다.

시골서 상경한 영자들도 당연히 많았다. 시골 출신들은 자기가 아는 영자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동네마다 있던 영자들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어디서 보았다더라, 잘 산다더라, 나쁘게 됐다더라 등 온갖 말들이 돌고 돌았다. 누이나 애인의 이름이 영자였다면 더욱 걱정스러웠다. 바로 전 해에 나온 ‘별들의 고향’도 호스티스 영화로 대단했다.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이라는 극 중 신성일의 대사는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지금도 흉내내고 있는 허장강의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와 더불어 최고로 유행되었던 영화대사 중의 하나였을 것 같다. 또한 별들의 고향에선 이장희가 부른 주제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지금 그는 ‘내가 번 돈은 남김없이 다 쓰고 죽겠다’는 인생의 신념을 갖고 울릉도에서 재밌게 살고 있다.

1973년 말에는 중동사태로 석유파동이 났었다. 경제적으로 시련의 시기였다. 집집마다 허리띠를 졸라맸다. 반찬도 급격히 달라졌다. 소고기는 아주 가끔만 먹었다. 마장동엔 도축장이 있었다. 거기서 할아버진 주로 수구레를 사오셨다. 소고기의 대용이었다. 수구레란 소의 가죽과 살의 중간쯤에 있는 특수부위. 기름과 살과 젤라틴이 섞여 있다. 이걸 간장 넣고 장조림도 해먹고 배춧국도 끓여 먹었다. 소고기는 소고기나 다른 부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격이 쌌다. 그러면서도 쫄깃한 식감과 구수한 맛으로 서민의 식탁에선 인기가 좋았었다. 지금은 건강에 안 좋다며 보기가 힘들어져 추억의 음식이 됐다.

또 할아버진 ‘애저’란 돼지 새끼들도 가끔 사오셨다. 새끼를 밴 채 죽은 어미 돼지의 배 속에 든 새끼였다. 부드러운 털이 꽤나 길고 살이 너무 연해 푹 익히면 젓가락으로 먹긴 힘들었다. 수저로 연두부처럼 퍼 먹어야 했다. 작은 냄비에 새끼 돼지 한 마리면 딱 알맞았다. 그렇지만 이웃에 선물로 몇 마리 주면 징그럽다고 싫어들 했다. 우리집 냉장고엔 애저가 수북이 쌓여 있는 엽기적인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전라도 진안에 애저찜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봤더니 배 속의 새끼 돼지가 아니고 이미 태어나 두세 달 정도 자란 돼지라 마장동의 애저완 사뭇 달랐다.

동대문구 끝인 망우리로 이사했다. 1975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망우리 공동묘지가 있는 고개를 넘어가면 그곳부턴 경기도. 48번 삼미운수 종점이 망우리였다. 차고지에선 아침마다 출근하는 어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몇십m씩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큰길 한가운데서 잡종개 암수 두 마리가 서로 딱 붙어 버렸다. 반대 방향을 보며 접붙어 한 몸이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해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에구머니나, 망측해도 유분수지! 민망스러워 못보겠다만 달리 눈길을 둘 곳이 없었다. ‘허참!’하며 남자들은 혀를 끌끌 차거나 키득거리고 여학생들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데 개들이 그렇게 철썩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흐뭇한 표정으로 슬슬 돌아다닌다는 게 신기했다. 한참 후 동네 욕쟁이 할머니가 뜨거운 물을 대야에 떠와 욕을 쏟아부며 개들에게 확 뿌리니깐 ‘깨갱’ 비명을 지르며 그때서야 떨어졌다. “육시랄 놈의 개새끼들이 식전부터 개지랄들이야.” 할머니의 육두문자가 참으로 게걸스러웠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여름이 됐다. 나의 중학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망우리 우리집 정원엔 노란 장미꽃이 활짝 폈다.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내 방의 미닫이 창문을 열면 안달이 난 계집아이들처럼 장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드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선남의 방에 선녀가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유월의 어느 날 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누구 걸 본 적도 없는데, 그저 그냥 만지다 참을 수 없어 끝까지 갔다. 첫 수음(手淫)의 추억이다.

겨울이 다가왔다. 곧 고입 연합고사. 나의 성적은 70명 중 35등 정도. 인문계 진학이 아슬아슬했다. 사실은 어려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과외를 받기로 했다. 남에게 의지하게 된다며 엄마는 과외를 아주 싫어하셨지만 상황이 다급한지라 어쩔 수 없었다. 우리집 2층에 세든 집이 과외교습소였다. 월세 대신 과외를 부탁하고 말았다. 겨우 합격했다. 시험이 끝나고 같이 과외를 한 김영희, 정금미, 하영재, 왕덕영과 중학시절 내내 유명했던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를 꽤나 불러댔다. 왕덕영이 기타를 잘 쳤다. 다같이 종로로 007영화를 보러 갔다가 질펀한 키스 장면이 나오자 김영희와 정금미는 징그럽다고 호들갑을 떨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노는 것만 생각하고 놀던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그들도 나도 괜히 어른이 되고 말았다. 빛바랜 중년이 됐다. 오그라들고 찌든 내장 속으로 소주 한잔 찔찔찔 들어가면 그제야 배시시 낯짝이 펴지니 나도 나에 놀란다. 내 꼬라지가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너는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응답하라 1975.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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