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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를 응시하라 /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2001년 9월11일 뉴욕 참사의 기억은 우리에게 아직 생생하다. 더욱이 9·11 테러 11주년인 11일 밤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미국 영사관이 습격되면서 지구촌에 참사의 아픔과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재난영화와 대중매체는 대규모 재난이 터지면 사람들을 대개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거나 병적 흥분에 빠진다고 묘사한다. 저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혼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도우며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상적 공동체 생활까지 한다는 것이다.
2003년 10월. 저자는 대형 허리케인이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핼리팩스를 할퀴고 지나간 직후 그곳을 찾았다. 나무와 지붕과 전봇대를 쓰러뜨린 시속 160㎞가 넘는 포효하는 바람, 약 3m에 육박하는 높이로 솟아오른 파도로 쑥대밭이 돼 버렸다. 하지만 저자를 안내한 사람은 이같이 말했다. “이웃들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돕고, 즉석에서 급식소를 만들고, 노인을 보살피며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폐허 속에서도) 서로 모르는 사이인 데도 서로를 보며 행복감을 느꼈죠.”
저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1906년 4월18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붕괴(2001년 9월11일), 뉴올리언스를 초토화한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 8월29일) 등 대형 재난 다섯 건을 심도 있게 연구 조사했다. 1917년 미국 핼리팩스 항구에서 폭발한 몽블랑호의 한 선원은 온몸을 던져 죽을 뻔한 원주민 여인과 아기를 구했고, 9·11 테러 때 신문을 팔던 한 시각장애인은 생전 처음 만난 두 여인의 도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책에 따르면 9·11 테러로 고층건물이 무너지고 폭풍구름의 암흑 속에 던져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약 2만5000명이 서로 도와 질서정연하게 대피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상자 수는 훨씬 컸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거리의 시민들은 다치고 당황하고 지치고 고립된 대피자들을 도왔다. 자원자들이 동심원을 이루며 재난 현장을 에워쌌다. 자원봉사자는 공학기술자, 건설노동자, 의료요원, 용접기술자 등 다양했다. 신부와 목사, 율법학자, 마사지사 같은 자원자들이 현장에 무수히 몰려들었다.
1917년 핼리팩스 항구에서 엄청난 화물선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야간 특근열차가 핼리팩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철도 배차원은 폭발 사실을 알고도 대피하는 대신 항구 근처의 전신국으로 달려가 경고 메시지와 고별 메시지를 남겼다. “기차를 세워라. 6번 부두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에 불이 붙었고, 경고 메시지와 함께 곧 폭발할 것이다. 아마 이것이 나의 고별 메시지가 될 것이다. 안녕.” 그는 죽었지만 그의 전보 덕택에 항구로 들어오려던 기차가 멈췄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난 지 11일 만에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 ‘뷸러틴’에 기사를 쓴 폴린 야콥슨도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후 모두들 당신의 친구가 되고, 당신 또한 모두의 친구가 됐다. 도시에서 사방의 벽이 다시 우리 방을 둘러치더라도, 이웃과 차단시켰던 예전의 외로움을 다시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대재난은 축제, 종교적 의례, 혁명 등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봤다. 그는 오히려 두려움에 빠진 엘리트가 재난에 어설프게 대응하면서 분위기를 망친다고 지적한다. 엘리트의 잘못된 판단과 무능한 관료 체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반면 시민의 풀뿌리 조직과 즉흥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이런 점은 현재 민주주의(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허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반면교사이자 앞으로 대재난 시대에 더욱 중요하게 부각할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현장 묘사와 사태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함께 시도되고 있다. 때로는 박진감 넘치는 르포 같고, 때로는 사색적인 철학 에세이 같고, 때로는 학문적 깊이를 지닌 논문과도 같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이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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