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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다. 40년간 한 번도 안 간 곳을, 하필이면 오늘같이 초대형 태풍이 몰아치는 궂은 날 불쑥 뜬금없이 가려 하니. 아내는 한사코 말린다. 어쨌건 난 지금 꼭 가고 싶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뭐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이미 택시에 탔다.

두근거린다. 40년 만이다. 홍제동에 가고 있다. 2012년 8월28일 강력한 태풍 ‘볼라벤’의 중심이 막 서해를 통과하고 있는 오후 4시50분. 겁먹어서인지 거리가 한산하다. 오히려 통행이 수월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무악재를 지나 홍제역 못 미쳐 홍제3거리란 곳에 택시는 날 내려 주었다. 대로에서 모래내로 향한다는 표지판이 있는 곳이다. 옛날 내가 살던 집터다. 지금은 1층에 LG전자 대리점이 있는 고층건물로 변했다. 설렘을 안고 나의 과거에 도착했다.

초강력 태풍답게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있고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다. 노란 은행 알들도 사방에 널려 뒹군다. 먹구름들이 재빠르게 머리 위로 지나간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세찬 빗줄기에 우산을 썼지만 내 아랫도린 이미 흠뻑 젖었다. 수첩의 글씨들이 잉크가 번지며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두 손으로 우산을 꽉 잡아도 금방 뒤집힐 것 같이 버둥거린다.

338m 높이의 인왕산은 이곳서 보면 초라하다. 겹겹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층 아파트 때문. 빛바랜 색으로 인왕아파트만 수줍은 듯 살짝 모습을 내밀고 있다. ‘나 아직 여기 있어’ 하는 것처럼. 서울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땐 부의 상징이었는데. 무악재엔 서울여상이 있었다. 그런데 안 보인다. 아파트에 가려서인가 아니면 이사 갔나. 알 수 없다. 굉장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1967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우리 집은 상당히 넓었으나 낡았고 지붕의 일부는 초가였다. 지금의 홍제동 우체국 옆에는 작은 개천이 흘렀다. 개천변엔 하늘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공중 화장실이 있었다. 동네 아이가 화장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지나가던 아저씨가 건져내 씻긴 후 독을 뺀다며 어른들이 강제로 인절미를 먹이는 걸 본 적도 있다.

앞산인 인왕산 계곡엔 나비가 많았다. 보기 힘든 신기하고 아름다운 나비도 볼 수 있었다. 제비같이 생긴 검고 큰 나비가 계곡에서 펄럭거리며 날고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풍경 같았다. 몽환적인 세계로 매일 아침 아버지와 같이 빠져들었다.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는 100년 전에 이미 인왕산에서 사라졌다.

인왕아파트가 완공돼 막 입주를 시작하던 1968년 1월에 큰 변고가 났다.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것이다. ‘박정희의 목을 따려고.’ 생포됐다가 후에 목사가 된 김신조를 제외하곤 전원 사살됐지만 인왕산은 곧바로 폐쇄됐다. 25년이 지난 1993년 3월에야 다시 개방됐다. 그때 군인들이 홍제동 일대를 둘러싸고 잔당들을 소탕하려 하수구까지 샅샅이 뒤졌었다. 곧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러잖아도 동해 쪽에선 무장공비 출현이 잦았을 때다. 공비 1명을 사살하는 데 국군이 평균 5명 정도가 죽어 굉장히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1·21사태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됐고 대북 침투를 위한 684부대(실미도부대)도 조직됐다고 한다. 하여튼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와의 인왕산 등산은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됐다.

그 즈음 홍은동에 유진상가라는 건물이 들어섰다. 대단히 큰 규모의 상업시설이었으며 특히 청과물 시장이 유명했다. 우리 집에 세들어 살고 있던 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네 어른이 유진상가 앞에서 리어카로 수박을 팔았다. 어느 날 친구를 도와 준다고 나도 밤늦게까지 수박 행상을 했다. 내가 호객행위를 잘한 덕에 꽤 많이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등이 전부 꺼져 있고 촛불 하나만 켠 채 엄마가 기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모두들 내가 없어져 애 잃어 버렸다고 큰 소동이 났던 것이다.

유진상가 앞에는 홍제천이란 개천이 흘렀다. 북한산에서 모인 물이 평창동과 세검정을 지나 흘렀다. 자하문 밖 세검정은 경치는 좋았지만 물이 너무 차가웠다. 아이들이 물장난치며 놀기는 오히려 수온이 적당한 유진상가 앞이 좋아 홍제천에서 수영하며 놀았다. 그런데 오래는 못 갔다. 왜냐하면 갑자기 물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유진상가도 곧 철거되고 그 자리엔 48층 높이의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그랜드힐튼호텔 자리는 온통 소나무 천지였다. 인왕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곳으로 송충이 잡으러 간 적도 있다. 지금의 홍제역 부근엔 성도극장이란 영화관이 있었다. 개봉관은 아니고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그저 그런 동네극장이었다. 학교에서 단체상영을 몇 번인가 갔었는데 그중 ‘사격장의 아이들’이란 영화가 감명 깊었다. 사격장 인근 황폐한 동네에 살며 탄피를 줍는 아이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다. 큰할머니와 식모누나와 함께 명작 ‘미워도 다시 한번’을 본 것도 성도극장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여배우 문희의 미모에 흠뻑 빠졌다. 몇 해 전 실제로 그분을 뵌 적이 있었다. 지금도 정말 아름다우셨고 그 후 막걸리도 같이 마신 영광스러운 추억도 있다. 또 ‘태양은 가득히’란 알랭 들롱의 데뷔작도 한참 지난 후 상영된 적이 있었다. 색안경을 끼고 찍은 포스터의 남녀 주인공이 참 잘생겨 어찌 저리도 잘날 수가 있을까 땅만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등교하다가 택시에 치였다. 정확히 배를 받혀 쓰러졌지만 곧 벌떡 일어나 학교로 걸어갔다. 놀란 택시기사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친 데는 전혀 없었다.

인왕초등학교 가는 길목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오늘 와서 보니 그 앞으로 서대문 세무서가 생겼다. 나무 뒤 문화전파사가 있는 건물 자리에 보신탕집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해피란 개를 친척 아저씨가 그 보신탕집에 판 것이다. 해피는 느티나무에 하루 동안 목이 매인 채 있었는데 방과 후 집에 가는 나를 보고 엄청 짖어댔다. 살려달라고, 그냥 가면 안 된다고. 아, 너무 미안하다. 그때 내가 어떻게든 너를 구했어야 했는데.

벽제 화장장이 생기기 전엔 홍제동에 화장장이 있었다. 화장장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곳엔 늘 누런 삼베로 된 상복 입은 사람들이 울고 있거나 술에 취해 있었다. 마당엔 커다란 은행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고. 오늘에서야 그중 한 그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굴뚝을 통해 뭔가 탄 찌꺼기가 연기와 함께 날렸었다. 우린 그것이 사람 탄 재라며 놀이 삼아 주으러 다니기도 했다.

엄마가 홍제동에 이사 와서 처음으로 양장점을 개업하셨다. 킹스타 양장점. 1967년 초겨울이었고 첫 손님으로 온 아가씨가 바지를 맞췄다. 엄마는 처음 받은 돈에 퉤퉤 하며 침을 뱉으셨다. 재수 붙으라는 기원이었고. 그 덕인지 몇 년간은 그런대로 대식구가 생활할 수 있었다.

TV가 많지 않았던 때라 아이들은 주로 만화방에 가서 5원 내고 TV를 봤다. 다행히 우리 집엔 TV가 있었다. 타이거 마스크, 요괴인간, 그리고 연속극 여로가 참 재미난 프로였다. 남진이 월남에서 돌아와 귀국쇼를 할 때엔 양장점 미싱, 시다 누나들이 열광하며 지르던 함성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특히 제일 많이 좋아했던 은자누나 잘 계시죠?

아폴로11호가 달 착륙한 장면도 TV를 통해서 봤다. 1969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낮에 집에 와보니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이 달에 착륙해 허우적대는 듯한 몸짓으로 우주인들이 뭔가 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런데 세 명이 갔는데 두 명만 달에 내렸고 한 명은 우주선에 남아 칠흑 같은 우주를 빙빙 돌며 기다려야 했다. 달 바로 앞까지 갔다가 그냥 온 우주인이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듬해 마포에서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또 그 이듬해엔 석회두부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두부 좋아하는 나도 석회 때문인지 허리가 뻣뻣해진 듯 느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냥 좋았다. 동네 성냥공장 공터에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가르쳐 준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 젖혔다.

홍제동 대로변에 관서체육관이란 태권도 도장이 있었다. 창덕여고에 다니던 막내고모와 난 그곳에 등록을 하고 태권도를 배웠는데 부사범이란 남자 고등학생 놈이 흔치 않은 여학생이 들어왔다며 딴 맘을 먹고 귀찮게 해 우린 할 수 없이 한 달도 안 돼 그만두고 말았다. 요란한 국회의원 선거도 있었다. 공화당에선 아나운서 임택근, 신민당에선 김상현, 김 후보가 당선됐다.

화장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은초등학교가 생겼다. 1971년 가을 난 정든 인왕초등학교에서 고은초등학교로 강제 전학했다. 집이 근처인 학생들은 무조건이었다. 6학년이 되자 구대회 선생님이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담임이 되셨다. 내 그림 솜씨를 퍽이나 아껴 주셨다. 공부 못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용기를 주신 분이다. 서오릉으로 소풍 가서 야외사생한 내 그림을 약주를 조금 드신 탓에 기분이 좋으셨는지 다른 선생님들께 자랑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그분이 안 계셨다면 화가가 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런데 난 큰 죄를 짓고 말았으니. 6학년 2학기가 되면서 면목초등학교로 또 전학을 가야 했다. 도서부장인 나는 방학이라 보관하고 있던 책들을 반납해야 했다. 헌데 다른 책은 다 돌려줬는데 생물도감만은 그러기 싫었다. 그냥 슬쩍 내 것으로 했다. 매일 하루 종일 그 책을 보며 동물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포천 외가댁에서 만난 동물들과의 인연 때문이지만 그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훔친 생물도감 덕이다. 내 생에 단 한 권의 책을 뽑으라면 단연 그 책이다. 그때의 도둑질이 평생 걸린다.

장소가 그리운 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것. 내게 홍제동은 김상일이다. 내가 갑자기 면목동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헤어진 후 서로 많이 그리워했다. 20여 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만난 상일이는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 친구야! 그는 거북이 박제를 팔고 있었다. 다섯 개를 샀다. 만남도 잠시 생활에 힘들어하던 친구는 먼 이국으로 이민을 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나둘 추억의 꽃은 쓸쓸히 지고 말았다.

지금 바람 부는 고은초등학교 담장엔 후배들이 그린 그림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학생의 날 기념 문예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이다. 화가가 되어 언젠가는 같이 전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앞엔 벽화도 있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타일로 만든 작품이다. 그래 맞다. 진실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지.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지. 지금 서대문도서관 자리는 얼룩젖소가 풀을 뜯던 목장이었다. 여긴 우리들의 영토였는데. 수풀 무성한 언덕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친구들은 없다. 여름이면 무악재에서 아카시아꽃 따 먹던 동무들, 그 순수한 눈망울들,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내 우산이 힘없이 젖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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