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논설위원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근무 첫날부터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1월2일 시무식 직후 기자들에게 ‘땜질식 처방’ ‘세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임기응변’ 등 평소 그답지 않은 격한 표현을 썼다. 직접 거명하진 않았으나 타깃은 국회였다. 여야 합작으로 소득세 ‘3억 원 초과’ 구간을 신설하고, 최고 세율을 35%에서 38%로 올린 게 2011년이 끝나기 불과 몇 분 전이다. 세제개편 주관 부처인 재정부를 제쳐놓은 ‘쿠데타’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또한 ‘부자 증세(增稅)’라는 경제외적 논리로 황급히 끼워넣은 것이라 기존 세법 체계와도 괴리가 컸다. 그 이후 박 장관은 ‘소득세 과표구간 조정’을 줄곧 공언해왔다.

8개월이 지나 박 장관이 들고 나온 세제개편안에 과표구간 조정은 없었다. 누가 묻기도 전에 변명에 나섰다. “큰 정치 일정을 앞둔 상태이고, 이번 정부에서 몇 년 뒤의 방안까지 내는 건 무리가 아닌가 판단했다.” 연초의 호기는 간데없다. 정치논리에 무릎 꿇은 항복선언이다. 역시 자신이 불을 지핀 종교인 과세도 흔적이 없다. 결국 박 장관은 재정부가 마땅히 할 일을 여당에 떠넘겼다. 새누리당은 한두 달 내에 의원 입법으로 조정안을 낼 계획이다.

소득세 과표구간을 바꿔야 할 이유는 많다. 다만, 조정해야 한다고 나서는 주체들마다 제 잇속에 따라 달리 분칠하는 게 문제다. 우선 지금 구간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최고세율 38% 구간(3억 원 초과)이 신설되기 전인 지난해까지 4단계-1200만 원 이하~8800만 원 초과, 6~35%가 적용돼 왔다. 1996년 만들어진 이 틀은 2008년 소폭 조정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변한 게 없다. 그러다 보니 35% 세율이 적용되는 8800만 원 초과자는 당초 7000명에서 지난해 28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그 사이 물가상승을 감안하지 않은 명목소득 증가율 (108%)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종전에는 차하위 26% 세율을 적용받던 중산층 상당수가 초고소득자로 둔갑했고, 그 아래 단계에서도 차례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 것이다. 앉은 채로 증세 폭탄을 맞은 셈이다. 특히 중산층의 타격이 컸다.

이런 상태로 놔두면 민심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짜낸 방안이 각종 비과세·감면제도다. 매년 이런저런 구실로 공제 리스트를 만들어 차액을 보전해줬다. 세제당국은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과표구간의 모순을 해소하려면 각 구간의 기준 금액을 지금보다 크게 높여야 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세수 감소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비과세·감면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 하지만 한 번 줬던 걸 빼앗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혜택에서 제외되는 계층·집단의 반발은 어찌 감수할 건가. 게다가 선거철엔 안되는 것도 만들어내는 게 정치인이다.

정치인들이 찾아낸 돌파구는 이번에도 역시 고소득자 증세다. 민주통합당은 38% 최고세율 기준을 3억 원에서 1억5000만 원으로 대폭 낮추는 세법개정안을 내놓았다. 적용 대상이 3만 명에서 14만 명으로 늘어나고, 1조2000억 원의 증세 효과가 있단다. 상위 1%에 세금 폭탄을 안기고 나머지 99%로부터 표를 얻어보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주요 기반인 중산층을 억누르는 현 과표기준의 모순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과표와 세율을 동시에 올리는 방안을 검토하는 모양이지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비과세·감면제도 정비엔 전혀 관심이 없다. 고소득자 중과로 얻는 건 연간 1조 원 남짓이나, 불합리한 비과세 편법 등을 제대로 정비한다면 6조 원 이상의 증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세금은 징벌이 아니라 의무이자 권리다. 지금도 봉급생활자 중 42%는 세금을 안 낸다. 소득이 있는 국민에게 단돈 몇 천 원이라도 세금을 부담케 하고, 굳이 필요없는 비과세 혜택을 없애는 것이 세제개혁의 시작이다. 고소득자에게 버는 만큼 더 내라고 요구하는 건 그 다음이다. 재정부는 과표구간을 어떻게 조정하고, 또 어떤 비과세·감면을 줄여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했어야 옳다. 차기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이해집단의 공격이 무서워 피해간 것은 비겁하다. 그래서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