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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페이퍼로드

독일 출신의 정치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지 못할 경우 악조차 일상적인 일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원흉이자 ‘아시아의 히틀러’로 불린 인물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다. 그의 손녀인 도조 유코(東條由布子)는 최근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부는 평화를 사랑하셨으며 친절한 성품을 지니신 분이었다. 외국의 침략자들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지킨 것”이라고 했다.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손녀의 수사 속에 악을 평범한 것으로 미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실제로 그는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서 일본의 전쟁논리를 합리화하는 데 앞장섰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태평양 전쟁 전범 도조 히데키의 삶을 다룬 평전이 나왔다. 도조 히데키는 전형적인 군인 출신 정치가로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된다. 책은 일본인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로 치부됐던 도조 히데키의 삶을 퍼즐처럼 치밀하게 복원해내고 있다. 도조 히데키를 떠올리면 구토 증세를 느낄 정도로 반감을 품었던 저자는 6년에 걸친 자료 조사를 통해 도조가 근대 일본 정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대의 산물’이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이 군사 지도자는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국제 법규에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군인이야말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 그는 국가를 병영으로 바꾸고 국민을 군인화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여겼다”고 썼다. 뼛속까지 군인의 피가 흘렀던 도조는 사실 20세기 전반 각국 지도자와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평전은 도조의 일기와 메모 등을 토대로 긴박하게 돌아갔던 전시 상황을 재구성한 소설처럼 쓰였다.

일본 총력전 시대를 주도한 도조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쳐 총리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은 1942년 총리, 육군상,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중일전쟁을 직접 경험한 그는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이후 확대된 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쟁의 폭풍우 속으로 몰아넣었다. 패전 뒤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교수형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 처형됐다.

도조가 말년에 정신론으로 급속도로 경도됐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책에 따르면 도조가 아케노(明野)비행학교를 시찰할 때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년들에게 “적의 비행기를 어떻게 격추할 것이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 소년들은 기관총과 고사포로 격추하겠다고 답한다. 도조는 고개를 저었다. 한 소년이 “저의 기백으로 격추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에야 도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것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저자는 70, 80대의 일본 옛 군인들까지 인터뷰한 뒤 “전쟁과 평화의 선택권을 총리에게 일임한다”는 오이카와 해군상의 역사적 실수와 일본 육군의 책임전가 문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또 직무권한을 무시하고 행한 도조의 전횡이 언제나 승조필근(承詔必謹: 천황의 조직을 받들어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의 자세를 취했다는 도조 옹호론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반격을 가한다. 이것은 도조의 무사상과 무정견을 드러내는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도조 같은 지도자가 최고 군부 지도자에 올라 2차 대전을 호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대 일본인들의 뼈아픈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히로히토(裕仁) 일본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은 전쟁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해왔다. 일본이 군사대국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 일본 전쟁의 책임자와 그들의 정신적 구조에 대해 더욱 철저한 해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책은 일본 군사 정치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