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사 / 도널드 서순 지음 오숙은 외 옮김 / 뿌리와이파리

책값이 싸지고 대중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몇 백 부를 찍어서 파는 게 보통이었고, 1000부도 꽤 많은 양이었다. 1만 부를 짧은 기간에 판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인쇄술은 15세기에 발명됐지만 책 시장은 300년 동안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오페라하우스는 그야말로 격조 높은 문화공간을 대표한다. 책에 따르면 그러나 18세기 상층계급이 후원하는 오페라하우스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회원제로 운영됐는데, 시간 엄수와 침묵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각에 도착하는 것을 촌스럽다고 여겼고 심지어 무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교적 결례였다. 각 박스석 안에서, 또 박스석 너머로 대화가 오갔으며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술에 취하고 노래를 불렀다. 당시 오페라하우스는 20세기의 나이트클럽 같았다.”

영국 런던대 유럽비교사 교수인 저자는 문화양식의 변천사를 ‘문화 팽창’의 관점에서 톺아본다. 문화산물이 상품으로서 시장을 통해 생산, 유통, 판매, 소비되는 문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사업으로서의 문화, 직업으로서의 문화에 초첨을 맞췄다”며 “여기서 서술되는 문화이야기는 시장을 위한 생산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부유층이 사치스럽게 즐긴 ‘고급’문화뿐 아니라, 까막눈 하층민의 고된 삶을 위로해준 ‘저급’문화, 20세기 문화의 주역인 ‘대중’문화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1800년부터 2000년까지 최근 200년간 유럽과 러시아, 미국 사람들이 읽고 보고 들어온 문화산물들을 망라한다.

저자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잣대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소설은 한때 격이 떨어지고 독자를 타락시키는 저급 장르로 여겨졌지만 세르반테스(1547~1616), 빅토르 위고(1802~1885), 도스토옙스키(1821~1881) 같은 작가들 덕택에 싸구려 문학에서 구제받았다는 것. 오늘날 몇몇 소설에는 ‘고전’이라는 근엄한 이름까지 붙어 있다.

책에 따르면 1800년 유럽인 대부분이 읽거나 쓸 수 없었다. 학교 교육은 의무가 아니었으며 대학은 소수 엘리트만 다녔다.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야 고작 동네 교회나 축제에서 무료로 듣는 것이 전부였다. 연주회와 쇼 같은 공연실황의 관람은 귀족과 중간 계급 등 소수의 특권이었다. 이들은 책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00년의 귀족보다 오늘날의 상점 점원이 문화적으로 더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문화시장은 급변했다. 지난 200년에 걸쳐 문화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논의의 시작이 왜 1800년일까. 저자는 “적어도 유럽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핵을 구성하는 나라와 지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반도, 독일어권 지역)에서 문화사업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 벗어나는 때가 이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 놓인 한 해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1800년부터 어느 만큼은 일관성 있게 책을 읽는 공중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연주회장 공연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작가, 극작가, 작곡가, 가수, 배우 같은 문화생산자들이 계속 늘어났다.

2790쪽, 총 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역작이다. 저자는 10년 가까이 이 책의 집필에 몰두했고 네 명의 번역가가 3년 반에 걸쳐 우리말로 옮겼다.

1부 ‘서막’(1800~1830)에서는 책, 신문과 정기간행물, 악기와 악보, 오페라, 연극 등 주요 문화형식들이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살핀다.

2부 ‘부르주아 문화’(1830~1880)는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제치고 핵심적인 문화소비자로 떠오르고 노동계급이 싸구려 연재소설과 정기간행물을 소비하기 시작한 과정을 다룬다.

3부 ‘혁명’(1880~1920)에서는 문화의 확산에서 혁명을 일으킨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대중시장이 나타나고, 연재만화와 범죄소설 같은 새로운 장르들이 인기를 얻는다. 아울러 축음기가 발명돼 음악의 소비와 생산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영화가 발명되고 확산돼 진정한 대중문화산업이 시작된다.

4부 ‘국가’(1920~1960)의 주요 주제는 문화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다. 공산주의 소련, 파시즘 이탈리아, 나치 독일 등 새로운 유형의 권위주의 체제들이 특정한 문화적 경향을 강화하거나 억누른 시대를 조망한다. 5부 ‘대중매체’(1960~2000)에서는 텔레비전이 대중매체로 발달한 과정과 텔레비전 장르들의 분화 현상을 짚어 본다.

책엔 그러나 미술은 포함되지 않았다. 저자는 “미술 시장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엘리트가 예술이라고 규정한 물건을 매매하는 투기적인 시장”이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