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천지가 비록 넓다고 하나
깊은 규방에선 그 참모습 보지 못하네
오늘 아침 반쯤 취하고 보니
사해는 넓어 가없도다

조선시대 송덕봉(1521∼1578)이라는 여성이 읊은 시다. 규방에만 갇혀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조선 사대부 여성에게 이곳저곳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송덕봉은 술의 기운을 빌려 천지를 누비고 있는 것이다. 그 상상력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애달픈 느낌도 없지 않다.

이 책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국토를 누비면서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앞서 든 송덕봉의 예에서 보듯 단순히 다른 고장을 둘러보는 일상적 여행의 범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방 안에 앉아서 그림과 글로 다른 곳을 여행하는 ‘와유(臥遊)’에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먼곳에 처해졌던 유배, 지방 행정을 정찰하러 가는 암행어사의 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일정들도 포함시키고 있다. ‘넓은 의미의 여행’인 셈이다.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돼 있다. 전반부는 시대적인 색채가 그다지 강하게 배어 있지 않은 주제들이다. 와유를 비롯, 치료를 위한 여행길이자 정치적 시험무대이기도 했던 ‘사도세자의 온천여행’, 별자리를 좇아서 거닌 옛사람들의 시와 노래 그리고 과학정신을 보여주는 ‘조선 사람들의 밤하늘 여행’ 등이다. 또한 사회적 관습과 법을 넘으면서까지 감행했던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예인(藝人)들의 수련과 득음 과정을 조명한 ‘조선 사람의 음악여행’도 이에 포함된다.

책의 중반에선 양반 남성들, 특히 관직생활이 함께했던 길을 따라가는 여행기가 펼쳐진다. ‘암행어사 길’은 자칫 낭만적 색채로 덧칠해지기 쉽지만 실제론 고난의 길이자 출세의 길,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또 과거 합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무관(武官) 노상추의 과거길을 통해 길 위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나랏님의 분노를 사 멀고먼 오지로 떠나야 했던 유배길이 형극의 길만은 아니었던 사실도 드러난다. 을사사화에 연루돼 경북 성주로 유배를 간 이문건의 여정을 통해 유배길이 죽음을 겨우 비껴간 험난한 일정만이 아닌, 지방관리들의 배려 속에서 나름 즐거운 유람도 포함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의 후반부는 19세기 말 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장돌림과 장삿길’에서는 오늘날 폭력조직과 유사한 면이 있었던 보부상단의 뒷이야기와 함께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삿길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울분을 백두산 여행으로 극복하려 했던 최남선의 이야기도 근대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들여다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소설가 박태원이 서울에서의 경험을 담은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나들이’에선 도시화의 모습과 도시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책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하나씩 알게 되는 새로운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