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엄마 영순(왼쪽·고수희 분)이 시노다 중좌(가운데 누워 있는 이·서상원 분)를 빗자루로 때리자 큰딸 진희(최수현 분)가 몸을 던져 이를 막고 있다.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55) 씨의 작품은 잔잔한 가운데서도 위트 넘치는 인간미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 2008년 초연, 2011년 앙코르 공연했던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을 비롯, 지난해 국내 무대에 올랐던 ‘아시안 스위트’, ‘겨울 선인장’, ‘쥐의 눈물’ 등 ‘정의신 연극’의 명성은 이미 자자하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진한 가족애, 그리고 작품 전체를 감싸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이다.

정의신 작가의 최근작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가 지난 12일부터 7월1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정의신 특유의 온정주의와 가족애로 가득하다. 해방 직전인 1944년 남도의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은 그곳에 주둔 중인 일본군과 ‘홍길이네 이발소’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 홍길과 어머니 영순 부부, 그리고 진희·선희·미희·정희 등 네 딸들이 가족의 주요 구성원이다.

극 초반부, 셋째 딸 미희와 만석은 결혼식을 올린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흥겹게 웃고 떠든다. 하지만 사위 만석은 미희의 언니 진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미희의 마음 역시 편치 못하다. 극이 진행되면서 네 딸들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가수 지망생으로 일본군 부대 클럽에서 노래하는 둘째 딸 선희는 군수품을 얻어와 어머니 영순과 옥신각신한다.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일본군 중좌 시노다가 이발소에 와 발을 씻겨 달라고 하고, 이를 첫째 딸 진희(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역시 한쪽 다리가 성치 못하다)가 정성스럽게 씻겨준다. 만석과 진희에 대한 불편한 마음으로 괴롭던 미희는 일본군에 징병된 원창과 격정을 나눈다.

아기자기하게 흐르는 연극은 막내딸 정희의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일본군 부대 지도를 빼돌린 정희는 이를 ‘공작파괴분자’에게 넘긴다.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에게 건넨 것이다. 이것이 발각돼 시노다 중좌가 헌병들을 이끌고 홍길 이발소를 덮치고, 정희는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다. 하지만 연행되는 와중에 불령선인이 도망가는 바람에 일본군은 총을 쏘고, 정희와 남자는 사살된다.

극은 이후에도 미희의 임신과 만석의 징병 등 소소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는 것은 시노다 중좌와 큰딸 진희의 로맨스다. 섬을 떠나게 된 시노다 중좌가 진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진희 역시 그에 화답한다. 일본군에게 막내딸을 잃은 엄마 영순은 분노를 터뜨리며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과 주위의 설득으로 영순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연극은 ‘화해 무드’로 막을 내린다.

여기까지다. 감상적인 온정주의와 극 전반에 깔린 진한 가족애가 빚어내는 ‘감동의 드라마’는 마침내 일본군 헌병과 피해자 조선인 가족의 화해까지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를 역사의 뒤안길에서 희생된 이들의 상처를 쓰다듬는다고 말한다. 물론 시노다 중좌와 일본군 헌병 노릇을 하는 조선인들(그들도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역시 역사의 희생자임에는 분명하다. 더욱이 ‘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같은 결말은 타당한가. 아니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는 마치 독일 나치에게 희생당한 유대인 가족이 그 아픔을 묻어둔 채 ‘선한’ 나치(그것도 공범자)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명백한 범죄에 대해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리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역사의식의 결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낼 때 감동을 불러일으키던 정의신의 온정주의가 ‘역사’라는 보다 큰 물줄기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는, 정확하게 기억될 때 비로소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02-758-2150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