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길여 총장이 지난 4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성남대로 가천대 교정에서 “지금껏 어떤 일을 성공시키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마음을 유지했기에 늘 행복했다”며 “뒷 세대의 젊은 학생들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 순간도 설렌다”고 말했다.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이길여(80) 가천대 총장 겸 가천길재단 회장. 가천(嘉泉), 즉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의 아호처럼 교육과 의료 두 분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성취를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이번 만남의 본질에서는 다소 비켜나 있는 잡스러운 궁금증에 불과하지만, 그를 만나면 우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 첫 번째. ‘평생 미혼으로 살아왔는데, 로맨스는 딱 한 번뿐이었는가. 자서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재미 한국인 사업가 청년과의 로맨스는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하는가.’

깜냥 회심의 질문이라고 여겼으나, 답은 간단했다. “책을 만든 출판사에서 내 인생이 너무 건조하다고 만들어 넣은 거다. 그 남자를 만났고 청혼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죽기 살기로 사랑한 로맨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소중했으면 내가 (일을 버리고) 그 남자에게 갔겠지.”

이 총장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여배우처럼 어여쁘고, 이지적인 기품까지 느껴진다. 그런 이가 평생 로맨스 한번 없었다니…. 무람없는 질문일 수 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한국 사회 리더 중에 남자로서 괜찮은 그릇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처음 받아본 질문이라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한번 생각을 해 보라고 재촉하니 예상 밖의 답이 나왔다.

“역대 대통령들이 다 훌륭한 남자였다고 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분들의 치적은 보지 않고 잘못한 것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은 역대 대통령들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의 세 번째는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 피부에 관한 것이었다. ‘도대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모의 비결이 무엇인가. 세간의 루머처럼 의학의 힘을 빌렸는가.’

이 총장의 모습을 다각도로 촬영한 김선규 사진부장도 같은 의문을 피력했다. ‘도저히 80대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얼굴만 보면 ‘누님’이라고 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젊디 젊은 미모를 유지하는 비결이 뭔지 알아낸다면 일대 특종이다.’

특종 욕심이 없는 기자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세 번째 질문은 끝내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파워 인터뷰’를 빌려서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눠 보니, 우문(愚問)에 불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호사가들의 입방아대로 그가 피부과 전문의들에게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전하는 것처럼 천부적으로 타고난 피부 미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비결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라는 게 인터뷰 끝의 결론이었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성남시에 있는 가천대 본관 총장실을 찾았을 때, 이 총장은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그는 지난 3월 가천의대와 경원대를 통합한 가천대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학교 홍보실에서 요청을 해왔지만, 인터뷰 질문지를 미리 드리지 않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인터뷰는 지루하기 때문이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다 물어봐라. 그런데 오늘 바빠서 잘 꾸미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신경이 쓰인다. 문화일보 ‘파워인터뷰’에 실린 사진들을 보니, 어떤 분은 흰머리까지 나오던데….(사진 촬영을 하는 김선규 부장에게 웃는 얼굴로) 흰머리 나오면 다 감춰버려라.”

―소설가 김주영은 ‘이길여 회장과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웃지 않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늘 웃을 수 있는가. 정말로 가식은 없는가.

“젊었을 때부터 의사로서 환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다 보니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된 듯하다. 지금도 환자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껴안으며 (곰살궂은 목소리로) ‘아이고 어떻게 오셨어?’하게 된다.”

―몇 년 전 만났을 때 웃음이 건강 비결 중 하나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지금도 잠자기 전에 집에서 러닝 머신을 통해 걷기 운동을 하나.

“물론 한다. 어제는 골프도 했다.”

그는 2010년에 에이지 슈트(age shoot·골프 경기에서 18홀 라운드를 자신의 나이나 그 이하의 타수로 끝내는 것)를 기록해서 주변 사람들의 감탄을 산 적이 있다.

그는 요즘도 참 많은 일을 한다. 가천대 총장, 가천길재단 회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경인일보사 회장, 사회복지법인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이사장, 사단법인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총재, 국립대학 법인 서울대 이사 등이 주요 직함이다.

―‘건국 후 가장 크게 자수성가한 여성 CEO’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일 욕심을 내려놓을 줄 모르는 인물’이라는 비판도 있다.

“일 욕심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표정이 다소 굳어져) 내가 무슨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의무와 책임으로 하는 것이다. 난 많이 배운 편이고, 오래 살며 많은 사회 경험을 했다. 병원과 학교를 운영하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이런 사람이 가만히 놀고 있으면 되겠는가. 능력이 닿는 한 쉬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가파른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내 밑에 줄줄이 많은 식구들이,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따라온다. 인류라고 하면 너무 큰가?(웃음기를 되찾고) 어쨌든 나는 선봉에 서 있다. 내가 중단하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던 일을 멈춰야 한다. 그렇게 책임을 느낀다. 온 세상의 고민이 내 거다.”

―지난 3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가 선정한 ‘2012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Women in the World) 150’에 포함됐다. 국내에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2명이었다.

“그 양반(박 위원장)은 지난번(2008년) KAIST 명예박사 받을 때도 함께 받았다. 분야가 다른데, 인연이 묘하다. 뉴스위크는 나를 선정한 이유로 봉사 정신을 특별히 강조했더라.”

뉴스위크는 이 총장을 선정한 이유로, “의사로 출발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의료법인을 설립하고 의료취약지 병원 운영은 물론 개발도상국의 심장병어린이 무료 수술 등 국경을 넘는 봉사 정신을 몸소 실천했고, 교육자로서 가천대를 운영하면서 글로벌 인재 양성에 앞장서온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총장과 함께 선정된 해외 인사로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부 장관, 아웅산 수치 미얀마 민주운동가, 배우 앤절리나 졸리 등이 있다.

―여성 중에 ‘저 사람 참 괜찮다, 배울 만한 사람이다’라고 느낀 이가 있나.

“음…,(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퀴리 부인이다. 중학교 때 퀴리 부인전을 읽고는 나도 노벨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 또 한 사람, 헬렌 켈러를 꼽고 싶다. 참 대단한 분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을 다 지켜보셨다.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으뜸의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 단결을 하고, 열심히 일한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6·25전쟁 후에 정말 비참했었다. 우리가 어떻게 그걸 이겨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가 강한 거 같다. 서로 갈등을 하면서도 통합을 이뤄내 발전을 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한국의 선진국 진입을 낙관하는가.

“낙관 안 하지만 믿는다. 20~25년 후쯤에 우리나라는 굉장한 일등국이 될 것이다.”

―요즘 자칭 사회지도층이 싸우는 거 보면 한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이 꼴을 보면서도 선진국으로 갈 것이라고 믿는가.

“그래도 우리는 잘 갈 것이다. 물론 정치판 등을 보면 우려스러운 게 많다. 그런데 내가 사는 동안에 이런 우려는 언제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더라. 내가 총장으로서, CEO로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경험으로 볼 때, 혼란을 참고 견디면 미래가 열리더라. 과거에도 항상 걱정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언론이나 인터넷에 노출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대학 이야기를 해 보자. 가천의대와 경원대 통합 추진을 할 때 일부 동문들의 반대가 있어서 구설에 올랐다. 공연히 일을 벌였다는 후회는 없었는가.

“후회는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벽에 부딪혔는데, 돌파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사심 없고 인류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한 것이니 나중에 그들이 이해할 거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다, 이렇게 생각했다.”

―학교를 통합하면 교내 파벌 등의 단점이 있을 텐데….

“단점? 전혀 없다. 물리적 통합을 했으니 양쪽의 시스템을 맞춰가는 과정에 있는데, 갈등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통합 후 가천대에 처음 와 봤는데, 새 건물을 많이 짓고 있더라. 이 돈은 어디서 나는가.

“긴축 재정 하고 있다. 우선 나부터 노력한다. 교내 노조에도 호소했다. 교직원이 솔선수범해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이 돌아가게 하자고 설득했다. 알다시피 내가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을 하며 30억원을 모금했다. 그때 동문들을 설득했던 호소 작전을 여기서도 활용하고 있다.”

―일은 많이 하면서도 월급은 한 푼도 안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 총장 밑에 있는 교직원들은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부담 하나도 안 갖더라. 뻔뻔이들이야.(웃음) 허리띠 졸라매자고 하면 입이 이만큼 나온다. 그래도 따라와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가천의대는 장학금이 많기로 유명했다. 가천대에서도 그 기조를 유지하나.

“물론이다. 공부 잘하면 전액 장학금을 준다. 시골의 가난한 아이들도 명문대에 진학해서 꿈을 갖고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교육철학이다. 가천대를 그런 명문대로 만들겠다.”

―경기도 교육감이 공개적으로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며 액수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식을 다 가르쳤으니까 대학교육의 질을 생각하지 않고(포퓰리즘으로) 말하는 것이겠지.”

―대학을 운영하는 분들을 만나 보면 대부분 기여입학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나라 정서로는 어렵다. 내가 대통령이라도 못할 것이다. 우리 대학에서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 듯싶다. 부모가 돈 있다고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른바 3불(본고사·고교 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을 찬성하는가.

“그렇다. 다만 교육정책이 왔다 갔다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의과대학을 의전원(의학전문대학원)으로 하라고 그러더니 또 홀랑 정책이 바뀌더라. 무슨 교육 정책이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달라지나. 그게 문제다. 교육 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2015년까지 가천대를 10대 명문대에 진입시키겠다고 했다. 도전 정신은 좋지만, 과한 목표 아닌가.

“물론 과한 목표다. 하지만 비전을 갖고 노력하면 된다. 1등 한다고 하면 2등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1등 못한다고 그러면 절대로 1등 못한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동감을 표할 수 있었다. 가천대에 찾아와서 총장실에 오기까지 만난 학생들의 표정이 너무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서그러운 표정으로 길을 가르쳐줬다. 그것을 언급하자, 총장을 보좌하는 교직원들은 “통합 후 학생들의 자부심이 크게 높아졌고, 이에 따라 학교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고 전했다.

―가천대의 G2(글로벌 톱2), N3(국내 톱3) 프로젝트는 어떤 분야에서 가능하다고 보나.

“과거 경원대 교수나 교직원들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글로벌 톱을 이루냐는 것이지. 가천대에 와서도 G2를 이야기하니까 반신반의한다. 그런데 글로벌 톱2는 이미 메디컬에서 온 거 같다. 지난 2004년부터 2000억원 가까이 투자해 ‘뇌과학연구소’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가천바이오연구원’ 등을 만들어 운영해 온 결과다. 국내 톱3를 이룰 분야는 현재 논의 중이다.”

―얼마전에 해외 석학을 영입하기 위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대학 설명회를 했다. 고령에 피곤하지 않았나.

“이달곤(전 가천대 행정학과 교수·현 청와대 정무수석), 박상철(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 교수와 함께 갔다. 열흘 동안에 미국 전역을 다 돌았더니, 두 교수가 걱정이 됐나 보더라. 그런데 아침에 자기들보다 먼저 일어나니….(후후)”

―조장희(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박사 등 세계적 석학들을 대거 영입하셨는데, 혹시 공을 들였는데 영입에 실패한 적은 없나.

“다 성공은 못한다. 안 오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자꾸 해외에 나가서 (석학들을) 만난다. 이제 여기서 그만 이야기하고, 밖에 나가자.”

인터뷰를 잠시 멈추고 교정에서의 사진 촬영을 위해 함께 나갔다가 가천대 홍보대사를 하는 남녀 학생들을 만났다. 이들 학생은 문화일보가 이 총장을 인터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응원차 왔다고 했다. 딱정벌레 모양의 교내 셔틀버스를 타고 진달래 동산으로 가는 동안에 이 총장과 아이들은 마치 친할머니와 손자처럼 구순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에 파묻혀 사느라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으나, 여학생들에게 “꼭 가정을 꾸려서 평범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학생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젊음의 향기를 풍기며 새새대는 아이들 속에서 이 총장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는 “총장 할머니를 너무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100년을 살아야 한다. 그동안 수많은 실패가 찾아오겠지만, 그만큼 기회도 온다. 자부심을 갖고 천천히 걸어라. 그러면 환한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인터뷰 = 장재선 전국부장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