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이순희 옮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복지논쟁이 잦아들었다. 없어서 힘겨워하고, 빚 때문에 가위눌린 사회적 약자 문제는 ‘4·11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실종돼 버린 듯하다. 최빈곤층의 현실과 생각,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질 2차 복지논쟁도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복지논쟁의 핵심인 ‘빈곤의 비밀’을 파헤친 책이 나왔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두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존 편견을 뒤엎는다.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비합리적이고 게으르며 무능력하다는 상투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책에 따르면 빈자들은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뭔가를 선택할 때 훨씬 더 신중하게 행동한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고 가족의 미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훨씬 더 많은 기술과 의지, 노력이 필요한 셈이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은 미래의 큰 이익을 위해 당장 감수해야 하는 작은 손해를 회피하는 허점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내릴 뿐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빈자들의 숨어 있는 합리성을 감안하고 ‘경제적 이득 추구’라는 인간 본성을 이용해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전략이다. 저자들은 느슨한 개입과 인센티브가 지닌 놀라운 힘을 가장 희망적으로 증명해낸다.

두 저자가 15년간 40여개 국가의 빈곤 현장을 누비며 실시한 연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도 라지스탄에서의 ‘경제적 인센티브 실험’이다. 이 지역에서는 어린이 100명 중 단 2명만이 필수 예방접종을 받고 있었다. 연구팀은 3개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서는 변화를 주지 않았고, 두 번째 그룹에서는 간호사들이 예방접종을 독려했다. 세 번째 그룹에서는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시킬 경우 부모에게 콩 2파운드를 주고, 필수 예방접종 다섯 가지를 모두 받으면 스테인리스 쟁반 세트를 줬다. 6개월 뒤 확인한 결과 콩과 쟁반을 인센티브로 쓴 그룹에서는 38%의 접종완료율을 기록했다. 간호사들이 접종을 유도한 그룹에서는 17%, 아무 변화도 주지 않은 그룹에서는 접종완료율이 6%에 그쳤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아이들을 많이 낳을까. 이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에서 자식의 수를 선택한다. 대체로 자신이 늙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많은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식 중에 아들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도 딸의 경제적 가치가 아들에 비해 낮기 때문이라는 것. 이어 정부 주도의 가족계획 캠페인은 가난을 퇴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고 노년을 대비할 수 있는 저축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출산율을 낮출 수 있다고 역설한다. 책은 가난의 덫을 걷어내고, 빈곤문제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을 과학적·실증적으로 찾아낸 역작이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