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경계를 넘는 여행자’ 지명관 선생이 12일 경기 안양시 비산동 자택 마당의 개화를 앞둔 꽃나무를 배경으로 자신의 80여 평생을 설명하고 있다. 신창섭기자 bluesky@munhwa.com

지명관(88) 선생은 경계를 넘나든 지성인이다. 사상에서는 신학과 철학, 이력에서는 학자와 언론인, 공간적으로는 남과 북에 이어 한국과 일본, 지식인으로서는 앙가주망과 데가주망의 경계를 오갔다.

그 스스로 지난 2004년 펴낸 회고록 제목을 ‘경계를 넘는 여행자’라고 붙였다. 그의 이력서에 올라온 대표저서도 ‘아시아 종교와 복음의 윤리’ ‘한일관계사연구’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으로 경계인의 지적 탐색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성’의 조건이 인문과 기술을 아우르고, 로고스와 에로스를 겸비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요즘 보기드문 큰 지성인이다.

그는 과거 ‘사상계’ 주간을 맡으며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이끌며 저항한 지성이었고, 20년의 일본 망명기간 중 잡지 ‘세카이(世界)’지에 ‘T·K생(生)’이란 필명으로 암흑기 재갈 물린 국내 언론 대신 15년 장기 연재로 한국의 현실을 알린 ‘저널리스트’였으며, 한·중·일 지식인 연대를 주도했던 통섭적 지식인이었다.

은퇴생활로 막 들어간 지 선생을 지난 12일 오후 경기 안양시의 자택에서 만났다.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지난해에 어느 지면에선가 뵀을 때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데, 제가 기록을 깼네요. 얼마 전 손수 설립하고 10년 이상 소장직을 지내셨던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 소장하신 서적을 모두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노 기자가 진짜로 마지막 인터뷰어가 될 것 같습니다. 책이고 뭐고 이제 내가 가지고 있어 뭐합니까. 더 많은 후학들이 돌려봐야죠. 대수롭지 않은 자료들이지만 나를 이어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아낌없이 덜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자의 서재가 너무 휑하지요?”

조만간 셋째 아들이 사는 미국 미네소타로 이사할 예정이라 그의 텅 빈 방에는 어머니 사진, 언론사 만평을 연재해 온 화백이 그려준 캐리커처, 한국 교회의 선구자이었던 김재준 박사의 붓글씨 액자들만 걸려 있었다. 무릎이 불편한 지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기자는 지 선생의 집필용 평상 위에 노트북을 켠 채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써내려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 나타난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를 탐색했다. 지 선생은 실제로 ‘원로 언론인’으로 현재의 미디어에 대한 따끔한 충고와 강한 바람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 어떤 직업 언론인보다 충실하게 대한민국 현대사를 기록해 왔습니다. 이 시대 미디어를 어떻게 보십니까.

“과거 제도권 언론들이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글을 제대로 못썼지요. 하지만 부정적 입장보다도 영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요. 미디어를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 않겠어요? 다 감옥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맛에 맞게 글을 써주다가도 슬쩍 입바른 소리를 끼워넣고, 다음에 글을 제대로 쓰려 노력했던 부분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지 선생은 자신의 친한 친구였다면서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선우휘씨를 거론했다. “그 친구는 그처럼 글을 쓰는 것을 ‘게릴라 수법’이라 했지요. 지금 바라보면 다만 이런 생각은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식인과 언론이 한국 사회를 함께 이끌어 간다는 연대감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반지성의 시대가 된 것 같아서….”

그에 따르면 지금은 문학도 소외된 시대다. 책을 전혀 읽어주지 않는 시대가 될 때 이런 사회의 불균형을 언론이 살려서 나라를 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데 요즘의 언론은 그렇지 못하다는 한탄도 했다. “언론은 시대를 그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아가는 방향을 전망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언론의 미래를 걱정하는 노저널리스트의 걱정이 깊게 배어 나왔다.

―평생 써오신 시국에 관한 단상을 ‘나의 정치일기’란 제목으로 출간하신 걸 봤습니다. 책을 구해 읽어보니 맨 마지막 맺음말로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을 바라본 소회를 올리셨던데요, 이제 임기를 마쳐 가는 이명박 정부를 기록한 일기는 없습니까.

“사실은 ‘속 정치일기’라고 할까, 내가 죽은 뒤에나 출판하려는 생각으로 기록해 놓은 원고는 있어요. 이명박 정부를 평가하자면, 역대 정부 중 제일 낫다고 봐요. 민주주의를 파괴하지도 않았고, 원만한 정권교체가 되도록 준비하고 있고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전체 정치 여정에서 네거티브한 사람으론 보지 않아요. 임기말 지지율을 웬만큼 유지하는 점도 그렇죠. 개인적 평가는 보류하고 싶습니다만.”

지 선생은 다만 우리나라에서 정치란 걸 할 때 지금 단계에서 인물을 선택하긴 힘든 시기라는 것을 강조했다. 지금은 두드러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며 거물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령도 자신의 접촉 범위 안에서 인물을 택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치에 대한 선생의 생각들이 계속됐다. “5년 단임제하에서 국민의 비판이 강해지고 말년에 본인의 집권 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은 어느 정권이나 수반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는 과거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민의 정치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으니까 처음엔 높다가 나중엔 비판적이 됩니다. 대통령의 과제라기보다 국민 전체의 과제라고 봐야죠. 한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이런 현상을 극복할 것인가, 임기 말기 국민과의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야 계속 지지를 받는 정부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앞으로의 큰 과제입니다.”

지 선생은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준비위원장직을 맡은 일이 있다. 그러나 정권 출범 이후 노 대통령의 행보에 환멸을 느껴 반(反)노무현주의자가 됐다고 털어놨다. 반대로 김대중 대통령은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지 선생은 DJ 정부 시절 한일문화교류위원장과 KBS 이사장 같은 중요 직책을 역임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되기 전 DJ를 만난 건 일본 망명 시절 딱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세카이’지에 다루었다.

“DJ가 대통령이 되고 제가 한일문화교류위원장을 맡으면서 양국 간 문화교류를 벌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대 여론이 아주 심했죠.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타국과 교류를 할 때 더 크게 성장했다’며 밀어붙였고 그 결과 한일문화교류가 시작됐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한류’로 이어지게 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무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보다 내각책임제가 한국 실정에 맞다고 한때 주장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런 적이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일본과 비교해 현재 우리가 그나마 나은 것은 대통령제 때문이라고 봐요. 내각책임제였으면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우리 국민이 집권세력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적입니다. 권력자를 신봉 숭상하는 측면이 약한 거죠. 현대사에서 존경하는 지도자를 가져본 경험이 없어서일까요.”

지 선생은 지금은 단임제의 대통령제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란다. 유독 잦은 총리 교체로 정치적 혼란이 심각한 일본에서 배운 교훈일 것이다. “인기가 떨어져도 5년간은 보장돼 있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이 말년에 개헌 화두를 끄집어낸 데 비해 이명박 대통령은 뜻을 비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의 욕구가 다원화된 시대입니다. 지도자가 8년, 10년 한다면 국민이 지루해서 못 견딜 겁니다. 뭐, 굉장히 비상한 대통령이 있어 국민과의 대화를 잘한다면 그만둘 때 국민이 더 하길 바랄 순 있겠지요. 어떻게 그런 대통령을 배출할 것인가가 큰 과제입니다.”

지 선생은 오래전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의 동북아연대, 나아가 아시아연대를 주장해 왔다. 그는 그 같은 생각을 배태시킨 역사적 모델을 민족적 고비마다 더 큰 안목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자 했던 당대의 지식인과 실천가들로부터 찾았다.

“우리나라 근대사에는 최익현, 안중근 같은 이들의 동양평화론이 있습니다. 아시아의 평화적 중재자가 된다는 거지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아시아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선 아시아 평화, 후 통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것부터 찾아가야 할 겁니다.” 지 선생은 “이런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문화·경제·정치적으로 동시진행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거대 시장과 정치력, 군사력 등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국은 한반도가 통일의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할 겁니다. 그래서 북한을 전진기지로 삼아 통일을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연일 뿐입니다. 역사의 방향은 통일로 갑니다. 세계대국으로 가려면 중국도 민주화해야 할 것입니다. 낡은 내셔널리즘 경향이 남아 있어 아직은 국제적 신뢰가 없어요. 중국이 그렇게 될 날을 기대하며 주변국들은 격려하는 입장이죠.”

―선생님은 당대의 일본 전문가입니다. 일본을 어떻게 봐야 하고 우리와의 관계는 앞으로 어때야 합니까.

“일본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대일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1965년에 일본을 첫 방문했을 때 지난날 군국주의 일본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일본은 평화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 유럽하고만 친하면 괜찮다는 내셔널리스틱한 생각을 갖고 있었죠. 일본은 동북아에서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복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15년이나 일본에서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익명으로 써왔는데 발각이 되지 않았거든요. 서슬 퍼른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그렇게 오래 용케 피할 수 있었던 비결 같은 게 있나요.

“도쿄(東京)에서 미행당한 적이 많았어요. 하지만 중앙정보부 안에도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카이’지의 ‘T·K생’이 나란 걸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거죠. 그로부터 ‘할 수 없이 일한다’는 고백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집 앞을 지키던 형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따라다니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에이, 나쁜 놈들. 행선지 보고는 해야 하니까 어딜 가는지만 알려주세요. 전 다른 데서 시간을 떼우다 가겠습니다’하고요. 자기 직업으로 밥은 먹지만 일 자체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거죠. 이런 점에서 일본의 ‘다테샤카이(縱社會)’와는 다릅니다. 일본인은 개인적인 양심은 속에서 아니라고 울부짖어도 조직의 명령은 순순히 따릅니다. 좀 더 조직의 인간인 것입니다. 한국인은 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통치하기 힘든 민족이라 할 수 있지요.”nosr@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