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스페인의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는 제목의 판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이미지는 ‘자아폭발’로 인해 우리의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다른세상 제공

자아폭발-타락 /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캐나다 북부 지방에 사는 코퍼 에스키모족에 대해 인류학자 엘먼 서비스는 “에스키모들은 자신감에 찬 경쾌함과 쾌활한 낙관주의를 보여주는데, 이는 함께 사는 외부인들조차 기쁘게 한다”고 기록했다. 1950년대 중앙아프리카에서 피그미족과 3년을 산 인류학자 콜린 턴불은 피그미족에게 삶이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며 근심 걱정이 없는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또 미국 작가 진 리들로프는 남아프리카의 타우리파 인디언들에 대해 “내가 본 이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썼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분명하게 평정심을 갖고 만족감을 느끼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이들 에스키모, 피그미족, 인디언의 공통점은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며 원시에 가깝게 산다는 점이다. 이들 종족이 문명사회의 사람들보다 더 만족감을 느끼고 산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현재 문명사회에 사는 인류는 어떤가.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듯이, 인류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행복과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이나 전쟁, 억압, 불평등 등 각종 사회적·개인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원시에서 문명사회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인류에게 이 모든 병리현상을 가져다준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국 심리학자인 저자는 “지난 6000년 동안 인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을 앓아 왔다”며 “이러한 모든 광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자아폭발’”이라고 말한다. 현대 인류가 앓고 있는 불안, 우울, 공포, 고독 등의 정신적 문제가 ‘자아인식’이 시작되면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타락이란 6000년쯤 전에 어떤 인류 집단의 정신에서 발생한 어떤 변화를 지칭한다”며 “타락은 이 사람들이 자아에 대하여 강하고 예민한 인식을 발달시킨 역사적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책은 자아폭발에 대한 구체적인 고고학적 증거도 제시한다. 책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인 기원전 4000년쯤 공동매장의 오랜 관행이 개인매장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전에 세계인은 표지나 부장품 없이 무명으로 매장됐지만 이 시기부터 기록과 명문(銘文)들에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며 그들의 발언과 행동들이 기록됐다. ‘개인성’에 대한 날카로운 자각이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아가 급속도로 과도하게 발달한 자아폭발이 고독과 죽음의 공포 등 정신적 고통을 가져왔고, 이런 정신적 불화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쾌락과 물질주의 등을 추구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아폭발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타락이 전쟁·가부장제·사회적 불평등 등 끔찍한 결과들을 낳았음에도 어떤 면에서 하나의 ‘도약’이었다고 말한다. 험한 환경에 대응해 우리 선조들이 발전시킨 스스로 생각하는 새로운 능력은 선조들에게 발명·창조성·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능력들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책의 원제인 ‘The fall’은 구약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사건을 지칭한다. 인류가 살던 비옥한 토양이 사막화되면서 주변 지역으로 이동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를 ‘실락원’이나 ‘타락’을 의미하는 ‘The fall’을 원용해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원시부터 현대까지 인류 역사에 기록된 폭력과 억압의 사건들을 상세히 분석하며 인류 역사가 진보보다는 퇴보로 점철돼 왔음을 입증해 보이면서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도 피력한다. 남녀간의 평등한 관계로의 발전, 인간의 육체나 자연에 대한 건강한 존경심 등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자아폭발’은 인류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긴 하지만 미래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며 “나는 지난 수천년 동안 인류 역사를 채웠던 광기로부터 우리를 천천히 벗어나게 하는 진화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도연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