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논설실장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여져야 하는 것-소석(素石) 이철승, 올해 89세,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는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정권 말기 1977년 당시 제1야당 신민당 총재 이철승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 사상 최악의 ‘친북적 포퓰리스트’ 지미 카터, 그는 2년 전 공산화로 끝난 베트남 전쟁 이후 극에 이르는 미국 내 염전(厭戰) 의식과 박정희 장기집권에 환멸해 미국의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내 민주화 세력을 등에 업고 주한 미 지상군 철군 계획을 밀어붙인다. 약소국 대통령, 그리고 인권탄압의 화신으로 매도되는 박정희의 역부족! 바로 그때, 대한민국의 명줄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바로 그때, 신민당 총재 이철승이 철군 반대 호소를 위한 28일 간의 ‘일본·미국 대장정’을 벌이며 일·미의 조야(朝野)와 언론을 훑고 다닌다. 국가 명운이 걸린 외교·안보에 관한 한 여야 정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초당외교. 이건 미화가 결코 아니다.

귀국한 이철승에게 박정희는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 류혁인을 통해 친서를 보낸다. “국가의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때에 이(李) 당수께서는 당내외의 만난을 무릅써 가면서 야당 외교와 초당외교의 훌륭한 선례와 전통을 이룩하셨다….” 박정희 친서? 이철승에겐 사약! 그걸로 30여년 정치생명의 사실상 종언. 당내 반대 세력에 의한 ‘청부외교’라는 엄청난 비난 공세. 주저하지 않는 이철승. 카터 특사단이 방한하자, 신민당은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촉구하는 장문의 특별성명을 발표→결국 카터의 철군계획 유보 결정→느닷없이 찾아온 박정희 서거→1980년 서울의 봄. 주한미군 철수가 만약 이 시기와 맞물렸다면? 제2의 6·25, 제2의 월남 공산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제1야당 신민당이 철군에 찬성한다며 연일 촛불시위했다면? 미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것! 이철승, 큰 정치가다.

제1야당 민주당 당대표 손학규, 그가 한나라당·민주당 자유자재로 정치적 주소 옮겨가며 얼마나 현란하게 국민을 속이고 자기 정체성·일관성을 그때그때 바꿔가는 ‘위장전입극’을 벌이고 있는지, 정의에 목말라 하는 국민의 분노에 호소하려 한다.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재협상한 걸 또 재협상해야 한다고 반대하는 건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영혼의 타락! 경기도지사 때 뭐라고? “FTA에 찬성하지만 지금 해선 안된다고 하는 건 기회주의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선 “어려운 결단을 한 걸 높이 평가해주고 더욱 힘있게 추진하도록 격려해주자”고까지 했다. 경기도지사 4년 마치곤, 김밥 싸들고 지구를 10바퀴 돌며 얼마나 열심히 투자유치했는지 자랑하는 책까지 썼다. 자신의 글로벌 이미지 높이려고. 그래놓고선 반대. 그러면서도 노무현의 봉하마을 묘역에 찾아가선 무릎꿇고 엎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노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 못한 걸 뉘우친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외쳤다. 비석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연극이 아닌 걸로 봐주길 바라는 그 표정. 완전히 뮤직비디오 촬영이다. 한나라당 땐 노무현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경포대)’ ‘비판할 필요도 없는 송장, 시체’라고 악담하더니. 한나라당 땐 김정일한테 한푼도 지원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젠 아들 김정은까지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정한다.

차라리 유시민은 일관성 있다. 자신이 쓴 ‘국가개조론’, 한·미 FTA에 대해 “박정희가 통상국가로 만든 대한민국을…더 크게 성공하는 나라로 만들자는 의지를 담은 전략적 선택이다. 이것 말고 성공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고 했다. 떳떳하다. 손학규! 김대중에 대해선 ‘행동하는 흑심(黑心)’이라고 했던 그가 당사엔 김·노 사진 걸어놓고 말끝마다 우리당, 우리당 한다. 언제적 우리당이라고. 이런 위장전입자를 당대표로 뽑은 민주당 당원들은 자존심이라도 있는지. 대통령 노무현이 한·미 FTA를 추진하자는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에게 뭐라고? “정치적 부담은 크지만 결단 내고 가자. 이런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다.” 손학규! 듣고 있는가? 이런 기회가 항상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똑바로 계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