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시 ‘들’ 전문)

천양희(69) 시인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에 첫 번째로 실린 시다. 1965년 이화여대 국문과 3학년 재학 중에 등단한 시인은 40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솔한 시어와 서정적 울림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 같은 ‘시의 힘’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일곱 번째 시집으로 상재한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에선 시인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서정보다는 묵상에 가까운 무게가 느껴진다.

시집을 관통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들’이다. 앞서 인용한 첫 번째 수록시 ‘들’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상과 골짜기, 능선과 계곡을 오르내린 후 마침내 맞닥뜨리게 되는 들판의 이미지가 시집의 색깔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고희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이 삶의 온갖 신산(辛酸)을 맛본 뒤 마주친 평온함을 빗댄 것일 게다. 시인은 또 다른 수록시 ‘겨울 들’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마들에 나가/ 들판 끝 본다/ 눈 끝의 새 본다// 들풀에도 새가 앉네/ 새는 가벼우니까/ 들판의 새보다 더 가난한 게 있을까/ 가난은 가도가도 가벼운 것/ 가벼운 것이 들 한쪽 물고/ 어둔 구름에서 나온 번개같이/ 날아간다 거침없이/ 허공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라도 하듯 거침없이//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진다/ 꽃 진 자리에 새울음 남아 있다/ 저 울음보다/ 맑은 가난이 또 있을까// 허허벌판”(시 ‘겨울 들’ 전문)

들판에서 새로, 새에서 가난으로, 가난에서 번개와 허공으로, 다시 새울음과 가난과 허허벌판으로 돌아오는 시인의 상념이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시인은 이 같은 깨달음과 관조의 세계를 표제시에 가까운 ‘어처구니가 산다’에서 보다 직접적이면서도 명상적으로 펼쳐 보인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시 ‘어처구니가 산다’ 전문)

세상의 삼고와 삼독을 모두 겪고, 버린 후에 하늘을 바라보는 시인. 그래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왔음을 아는 시인은 이제 하늘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끝내 가닿을 수 없는 별과 하늘이지만 그래도 우러러보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심사가 시집 곳곳에 펼쳐져 있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숭원씨는 “천양희의 시는 시와 삶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 차 있다”며 “그가 써낸 시작품은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성찰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어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것들을 생각한다”며 “가파른 나를 살려준 건 시였지만 굽은 마음을 펴게 해준 건 눈물을 아는 벗들이었다”고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