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신영무 변호사가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내 한 식당에서 ‘약속의 의미’를 설명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동훈기자 dhk@munhwa.com

신영무(66) 변호사는 오랫동안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세종을 한국의 대표 로펌으로 이끌어온 인물이다. 신 변호사는 1970년대 미국에서 증권법으로 박사학위를 따면서 당시로선 생소한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세계자본시장의 심장부인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국제 비즈니스 실무를 익힌 국제금융통이기도 하다. 세종이 1980년대 한국의 금융시장 개방 작업 실무를 주도할 때나 1990년대 외환위기 당시 국내 대기업들의 금융거래 자문역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신 변호사는 지난 2007년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났고, 이달 초엔 대표변호사직을 공식 사임함으로써 설립 당시부터 공언해온 ‘65세 정년퇴직’이라는 약속을 지켰다. 법률시장 본격 개방, 로스쿨 도입 등 법률시장의 패러다임이 뒤바뀌고 있는 급변하는 상황에서 지난 2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내 한 식당에서 신 변호사를 만났다.

“세종의 저력 말입니까.” 신 변호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저의 가장 큰 자산은 믿음과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약속한 건 무조건 지켜야 된다는 걸 생활철학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약속을 잘 지킴으로써 믿음을 주고받는 것, 신의(信義)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약속과 관련한 에피소드 한 토막.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 한 분이 마땅치 않아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시험지 백지로 제출하기’를 단단히 약속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훈육선생님께 불려가 엄청 야단을 맞았죠. 벌도 받고요. 하지만 전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약속 경영’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세종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경영과 회계를 위한 파트너제 도입은 국내에서 선례를 찾기 어렵다. 특히 창업자를 포함한 ‘65세 정년제’ 도입은 다른 로펌들이 추종하기 힘든 제도다. 그가 63세 되던 해인 2007년에 경영 2선으로 물러난 데 이어 최근 대표직을 내놓은 것은 바로 신의를 우선으로 여기는 ‘약속 경영’의 철학에 기인한다.

신 변호사가 가장 좋아하는 경구를 묻자 ‘팍타순트 세르반다’라고 말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을 가진 고대 로마시대의 법어(法語)다. “약속이 지켜지면 신뢰가 쌓이고, 신뢰가 쌓이면 법치가 가능해지고, 법치사회가 되면 선진화가 된다”고 신 변호사는 강조했다.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신 변호사는 2년간의 판사생활을 접고 1975년 미국 예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증권법. 당시만 해도 한국에 전혀 소개되지 않은 분야다. 지금이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하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 변호사는 인터뷰어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했다. “증권법은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는 회사 관련 법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분야입니다.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자본시장을 육성하는 게 정부의 최우선적인 정책순위가 되겠다는 판단도 했습니다.”

한국인 유학생 증권법 박사 1호를 기록한 신 변호사는 예일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귀국해 세종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한국에서도 영미식 로펌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 순탄치 않았다. 월급 때만 되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자문 등을 하는 영미식 로펌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대 들어 4단계에 걸친 자본시장 자유화 과정을 겪게 되면서 환경이 급변했습니다. 1981년 투신사들이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을 경쟁적으로 발매할 때인데, 제가 관여한 한국투자신탁이 1주일 먼저 발매해 그 분야의 바이블로 우뚝 섰습니다. 담당 임원이 좋아한 나머지 ‘신 변호사를 업고 서울운동장을 한바퀴 돌겠다’고 했는데 운동장까지는 못가고 나중에 술집 가서 저를 업고 한바퀴 돌았습니다. 하하하.”

뒤이어 ‘코리아 펀드’ 설립(1983년)과 삼성전자의 해외 전환사채 발행(1984년)에 직접 관여하면서 신 변호사 체제의 세종은 업계 대표주자로 자리잡았다. 실제로 업계에 따르면 1997년말 외환위기 이후 법정관리나 화의, 증권법 자문과 금융기관 인수·합병(M&A) 등 분야에서 세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였다고 한다.

그런 신 변호사에게 요즘 깊은 고민이 생겼다. 위기에 놓인 변호사 업계를 생각할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1년에 변호사를 1000명씩 뽑은 지 7년이 됐다. 7년 전에 4000명에 불과했던 변호사의 숫자는 지금 1만1000명으로 늘었다.

―로스쿨 인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7년 후엔 변호사 숫자가 2만명으로 늘고 다시 5년 후엔 3만명이 됩니다. 혼란이 많을 것 같은데요.

“개업 5년차, 30대 초중반의 젊은 변호사들의 연간 평균수입이 3600만원입니다. 어디 자리 한 개라도 나오면 수백명씩 몰려듭니다. 당초 로스쿨에서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할 때 정부 각 부처나 기업에서 이를 소화해내겠다는 사회적 약속이 있었습니다. 한데 이것이 안 지켜졌어요.”

신 변호사의 걱정이 이어졌다.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돈이 없어 가정불화도 생기고요…. 얼마나 참담한 현실입니까. 우수한 인재들이 수년간 고시촌에서 공부하고 합격의 영예를 안았지만 연수원 마치고 나와 보니 꿈과 희망이 없는 겁니다. 정부의 로스쿨 대책은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신 변호사는 대통령 직속의 ‘로스쿨 및 변호사 대책 위원회’가 설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청년변호사를 위한 일자리 대책도 만들고 변호사 업계의 직역 창출을 위한 중장기적 전망을 도출해 내야 합니다.” 신 변호사는 “변호사들도 스스로 문턱을 낮추고 투철한 대국민 서비스 정신을 갖추는 등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법률시장에서 걱정하는 또 한 가지가 내년 7월부터 본격화하는 해외 법률시장 개방문제입니다. 웬만한 국내 로펌들은 고사할 것이란 우려가 많은데요.

“내실을 기해야죠. 큰 로펌들은 아마 자체 생존을 모색할 거고요, 중소형 로펌들은 정신만 차리면 기회를 만들 수 있어요. 일본의 경우 변호사가 200명이 넘는 4대 로펌들은 다 잘됐어요. 그런데 중간쯤 되는 사이즈들은 외국에 먹혔습니다. 외국 로펌들이 약속을 어겼죠. 외국 로펌들이 현지 로펌들을 합병한 뒤 일본 변호사를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해서 예속을 시킨 겁니다.”

신 변호사는 외국 개방을 단지 무서운 상황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외국계 로펌의 기술, 노하우, 자본력, 마케팅 기술 등을 배우고 이를 통해 국제거래에 참여하면서 이익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위기이지만 기회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외국 로펌이 들어오면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고객 입장에서 보면 서비스가 좋아질 거고요. 구조를 잘 다지고 체질을 새롭게 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큰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세종은 광장이나 태평양 화우 등과 국내 로펌 시장에서 2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세종은 외국계와 제휴하지 않고 ‘토종 브랜드’를 지킨다는 방침이 확실하다. “외국에 합병되는 중소형 로펌들이 업무를 확장하고 우리 시장을 넘보면 우리로서도 걱정할 일이겠죠. 그러나 우수한 변호사 인력들이 국내 로펌으로 몰리고 그게 성공의 자양분이 됐던 일본의 경우에서 보고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결국 젊은 엘리트 변호사들이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인데요. 유능한 인력들을 유인해내고 토종 로펌의 체질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겠네요.

“맞습니다. 독일은 완전히 실패했죠. 체질 강화가 안 된 거예요. 대륙법계가 영미법계보다 로펌 경쟁력이 약한 거죠. 국제 상거래에서 영미법이 기본이 돼 있을 뿐 아니라 국제언어가 영어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격변기에 변호사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고객의 이익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흉악범이건 악덕 기업이건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의 권익을 충실하게 대변해야 합니다.”

―그 경우 때로는 사회적 정서나 대중적인 가치와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법의 테두리라는 게 중요합니다. 고객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허위 증인을 세우고 문서를 위조하는 등의 일을 저지른다면 그건 안 될 일입니다. 불법과 위법을 하는 순간 더 이상 수임을 못하게 해야 해요.”

신 변호사는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어했다. 인치가 아닌 법치가 구현되는 사회, 법이 이끌어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게 변호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변호사는 공인입니까, 사인입니까.

“두 가지 모두 다입니다. 변호사는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익적인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고객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사적인 측면이지만 최근엔 공적 성격이 많이 약해져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돈벌이에만 급급해선 안 돼요. 국가적으로 중대사가 있을 때 변호사는 눈치 보지 말고 바른 소리를 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단체의 회장 정도 되면 대통령에게 할 소리 다 해야 하고요. 원로로서 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요. 그게 공적인 사명입니다.”

신 변호사에게 변호사는 두 개의 모습을 갖는다. 분쟁 당사자와 고객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연’의 얼굴, 민주사회 발전을 위해 일한다는 ‘주연’의 얼굴. 이중 법치를 통해 민주사회의 발전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변호사는 분명히 공인이자 주연이라는 신 변호사의 말에 강한 무게감이 실렸다.

최근 들어 신 변호사는 장학사업이나 사회활동 등을 통한 봉사의 영역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신 변호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7남매들이 장학재단을 설립하도록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부모님의 ‘가운데 이름’자를 따서 지은 ‘주성장학재단’이다. “자식 사랑에 대한 두 분의 열정을 소외된 이웃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신 변호사는 장학재단을 운영하면서 나눠야 더 커진다는 생각이 갈수록 절실해진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또 2년 전부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활동에도 적극 관여해 왔다. 최근 ‘총체적 비리’로 지탄을 받은 공동모금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래서 더하다. “중앙회에서 지방회를 감독하는 게 한계가 있어요. 모금회는 처음부터 지방분권주의로 설립됐어요.”

신 변호사의 가장 큰 걱정은 이번 비리 사건으로 일반 시민들의 소액기부가 크게 줄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한국의 소액 기부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30%밖에 안 돼요. 미국은 소액 기부가 기업 기부를 훨씬 넘어섰는데…. 중산층이 아직 약한 거죠. 광에서 인심 난다고 먹고살 게 충분해야 하는 건데요.”

그럼에도 불구, 신 변호사는 공동모금회가 진행 중인 ‘사랑의 온도탑 100도 달성’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민들이 여전히 밉든 곱든 공동모금회가 국내 유일의 법정모금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신 변호사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힘은 결국 이웃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 허민 사회부장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