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400년 전 백제 나주 지역에서 쌀과 보리의 이모작(그루갈이)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논에서 여름에 벼를 재배해 가을에 수확한 다음 그 자리에 보리 등을 봄까지 재배하는 경작 형태인 이모작은 국내에서는 고려말·조선초에 도입됐으며 물이나 비료 문제 등으로 임진왜란을 지나 17세기에 들어서야 일반화(보편화)됐다는 게 그동안의 통설이었다.

일본 목간(木簡) 연구의 권위자인 히라카와 미나미(平川南) 국립역사민속박물관장과 이성시 와세다(早稻田)대 교수는 지난 10월28∼29일 전남 나주시 중흥골드스파&리조트에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연웅)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7세기 초 백제 나주 지역에서 이모작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6~7세기 영산강 유역과 백제’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히라카와 관장 등이 이모작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지난 2008년 7월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인근의 대형 수혈(竪穴·구덩이)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에서 출토된 백제의 촌락문서에 해당하는 5호 목간(18.5×2.7×0.6㎝)의 뒷면 묵서(墨書·붓글씨).

나주 복암리 유적의 발굴 책임자였던 김성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에 따르면, 나주 일대 촌락으로 추정되는 대사촌(大祀村)의 호구 실태를 기록한 5호 목간의 뒷면 31자는 “경(涇·지명) 땅의 수전(水田) 2형(形·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에서 72석을 수확했고(涇水田二形得七十二石) 그 달 30일에는(在月三十日者) 전(畠) 1형에서 62석을 수확하고(畠一形得六十二石) 맥전(麥田) 1.5형을 경작할 권리를 얻었다(得耕麥田一形半)”로 판독된다. 이 가운데 ‘畠’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에 나오는 ‘백전(白田)’을 한 글자로 합친 글자로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쓰지 않지만 일본에선 지금도 밭을 의미하는 ‘하타케(はたけ)’로 읽히며 사용되고 있다.

김 소장 등 발굴조사단 측의 해석에 대해, 히라카와 관장은 “5호 목간의 뒷면은 문맥으로 볼 때 수전과 밭에서 수확한 뒤 뒷갈이를 했다는 의미로 이모작을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이 수전과 밭, 맥전 등 3가지 형태의 토지가 별도로 존재했다고 본 반면, 히라카와 관장은 수전과 밭에서 수확한 뒤 바로 그 땅을 갈아엎고 보리를 심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와타나베 아키히로(渡邊晃宏) 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 사료조사실장도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히라카와 관장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밝히는 등 이번 학술대회에 참석한 일본의 목간 연구자들은 5호 목간을 당시 이모작을 나타낸 기록으로 이해했다. 이와 관련, 한국목간학회장인 주보돈(사학) 경북대 교수는 “7세기 초 백제 나주 지역에서 이모작이 실제로 행해졌다면 농업사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경제사를 새로 써야 할 내용”이라고 1일 밝혔다. 히라카와 관장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이모작은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시대인 13세기에 들어서 시작된 것으로 교과서에 기술돼 있다.

한편 히라카와 관장 등은 출토 당시 6조각 난 채 발견된 호적 관련 문서인 2호 목간(잔존 최대 길이 28.1㎝, 너비 5㎝, 두께 0.3㎝) 앞면의 일부 글자에 대해서도 새로운 판독 결과를 내놓았다. 김 소장이 제시한 판독안 가운데 대구(對句)를 이루는 ‘歸中口二 小口四’와 ‘背中口一’에서 ‘歸(다시 돌아오게 된)’와 ‘背(도망친)’를 히라카와 관장은 각각 ‘婦’와 ‘妹’로 새롭게 읽었다. 또 이를 통해, 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에 등장하는 ‘歸人中四口 小口二’의 ‘歸’도 ‘婦’로 판독문을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직경 6.92m, 최대 깊이 5.37m에 달하는 역원추형의 대형 구덩이에서 출토된 목간은 총 65점. 이 가운데 13점에서 붓글씨 흔적이 확인됐는데, 백제의 중앙지역이 아닌 지방에서 최초로 출토된 목간이자 지방관아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문서행정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을 받아왔다. 나주 복암리 목간과 관련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 이번 학술대회에서 히라카와 관장은 “나주 복암리 목간 한 점 한 점이 한·중·일 동아시아 고대 3국의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목간에 등장하는 ‘경오년(庚午年·추정 610년)’ 간지와 일본 나고야(名古屋)대 연대측정센터에서 실시한 가속기질량분석(AMS)을 통해 대형 구덩이 출토 유물들이 6세기 말~7세기 전반에 폐기됐다는 분석 결과를 확보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