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시각장애인 감독 임덕윤씨는 카메라를 이마에 얹은 채 촬영한다. 카메라 앵글을 고정시키고 수평을 맞추기 위해 그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광주 = 심만수기자 panfocus@munhwa.com

색안경을 쓰고

‘화이트스틱(White Stick·장애물의 위치와

지형 변화를 알려주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을

든 남자가 병원 문 밖을 나선다.

남자의 모습을 제외하면 세상은 시커먼 암흑.

어디선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남자 주위를 돌다가 그의 팔을 덥석 문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느새 뱀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다.

주위가 다시 밝아지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비장애인’이 남자에게 묻는다.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한다. “죄송합니다만, 저 같은 시각장애인을 도와주실 때에는 먼저 인기척을 해주세요.” 시각장애인 영화감독 임덕윤(41)씨가 만든 영화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의 한 장면이다. 시각장애인을 발견한 비장애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무시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그러나 도움을 주려는 행동이 의도하지 않게 시각장애인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아는 비장애인은 많지 않다.

“지하철을 탔는데 도와주겠다며 팔을 덥석 붙잡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각장애인들은 직접 접촉하거나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깜짝 놀라요. 마치 뱀이 팔을 덥석 문 것처럼요. 처음에는 ‘괜찮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하고 대답하죠. 그러다가 또 붙잡히고, 또 붙잡히면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놀란 상태에서 또 놀라니까 저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되고요. 아차 실수했다 싶죠. 그 사람은 아마 앞으로 시각장애인을 안 도와줄 거예요.”

지난 1일 광주 서구 금호동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임 감독을 만났다. 미리 그의 영화를 본 터라,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한 뒤 인사를 건넸다.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 조심스러웠는데 임 감독은 너무도 쾌활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수다스러울’ 정도다.

“제가 만든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은 시각장애인이 겪는 세상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사물이나 사람과 접촉하기 전에는 주인공 덕윤(임 감독 본인이 연기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암전(暗轉)’ 상태죠. 누군가 말을 걸거나 사물에 몸이 닿으면 그곳에 있던 사물이나 사람이 하얀 실루엣으로 표현됩니다.”

임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가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불과 4년 전 일이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87년 김혜수, 최민수 주연의 ‘그 마지막 겨울’에 최민수의 친구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학창보고서’, ‘고교 오성군 한음군’ 등의 영화에 출연했고, ‘섬강에서 하늘까지’, ‘재즈빠 히로시마’ 등의 영화에서 연출부로 경력을 쌓았다.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기획됐다가 무산된 영화 ‘야간비행’에서도 연출부로 활약했다.

몇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며 감독 데뷔를 꿈꾸던 그의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은 2003년 가을. 20대부터 당뇨 증세가 있었지만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믿었던 임 감독은 오른쪽 눈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망막박리라는 진단이었다. 2004년 다섯 차례의 수술 끝에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2005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뇨 합병증인 만성 신부전증이 찾아왔다. 그나마 왼쪽 눈 하나로 일상생활이 가능했지만 2006년 그마저도 시력을 잃었다. 두 눈은 멀고, 1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황. 말 그대로 앞이 깜깜했다.

“처음에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잠잘 때에도, 밥 먹을 때에도 그 생각만 했어요. 어떻게 하면 잘 죽었다고 소문이 날까. 칼로 찌를까, 총으로 쏠까. 총이 가장 깔끔하겠는데 눈 성한 사람도 구하기 힘든 총을 어떻게 구하냐고요. 하하하.”

그는 스스로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늘 수다스럽고 쾌활하다. 말 몇 마디에 농담 하나씩 섞지 않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다. 정말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런 걸까.

“막말로 장애인을 ‘병신’ 만드는 건 가족들입니다. 저도 부모님과 집에 있을 때에는 매일 짜증만 부렸어요. 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가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해줄게. 오죽하면 장애인 부모의 소원이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겠어요?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당신들 가시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해요. 라면 끓여 먹으려다 불에 데어 봐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돼요. 계단 혼자 내려가다 넘어져 봐야 혼자 걷는 데에 익숙해집니다.”

임 감독은 가족들과 떨어져 전남 보성에서 살고 있다. 혼자 살다 보니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보장구(保障具)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텍스트나 바코드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보이스 아이 스캐너(Voice Eye Scanner)’를 이용하면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바코드 스티커를 부착한 물건의 정보를 담을 수도 있다. TTS(Text To Speech·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주는 소프트웨어) 기능이 달린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임 감독은 보장구를 이용해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친한 친구들이 가끔 그래요. ‘저 녀석, 조금 보이는 거 아냐? 어떻게 문자를 보내?’하고요. 하하하.”

그가 쾌활한 것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야 할 희망, 반드시 이뤄야 할 삶의 목표. 그를 지탱하는 것은 평생 꿈꿔 왔던 영화다.

“제가 영화를 만드는 건 일종의 ‘소심한 시위’예요.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해야죠. 그러려면 영화가 재밌어야 해요. 제 영화가 다큐멘터리로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팬터지 드라마로 구상했어요. 자장면이라고 만들어 놨더니 사람들이 그걸 짬뽕이래, 뭐 어때요? 한 사람이라도 더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하하하.”

임 감독은 ‘찐한 멜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게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린다. 관객들을 감동시킬 궁극의 멜로 드라마다.

“군산에 가면 채만식 문학관이라고 있어요. 아주 작은 기념관인데 그곳을 지키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죠. 너무 쌍팔년도 멜로인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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