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여배우들에게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명품 고정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여정이 그대로 녹아있어 다른 배우들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감동의 명편으로,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관객들이 줄을 서는 달러박스들이지요. 김성녀씨의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16∼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사진·02-747-5161)이 그런 작품입니다.

김씨가 5세 딸에서부터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경찰, 이웃집 사람들, 딸의 남자친구, 심지어 딸의 딸까지 4세대에 걸쳐 1인32역을 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노래와 춤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2005년 초연, 그해 한국예술위원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예술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고 전회 매진, 기립박수를 받는 등 예술과 흥행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습니다. 김씨의 제20회 이해랑상 수상 기념으로 무대에 오르는 올해 공연은 경술국치 100주년과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더욱 뜻이 깊어 보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福田善之)의 원작을 극작가 배삼식씨가 한국전쟁 상황으로 옮겼습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등장, 얼핏 무거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이나 이데올로기는 상황만 제공할 뿐 극은 온전히 가족간의 사랑에 바쳐졌습니다. 벽에서 말소리가 들리며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자 벽 속에 요정이 사는 줄 믿었던 아이가 커가면서 그 ‘벽 속의 요정’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남편을 벽 속에 숨긴 채 40년을 살아야 했던 아내의 이야기, 청년으로 벽 속에 숨어들었다가 노인이 돼서야 나온 아버지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맞물려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이 작품의 감상포인트는 역시 배우와 어머니, 아내, 극단 운영자, 대학교수 등 현실에서도 늘 1인5역 이상을 하는 김씨가 조각해낸 다양한 인물들입니다. 김씨는 “이들을 모두 모으면 내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재현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새롭게 가공된 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김씨가 50년 가까이 무대에 서오며 자신의 삶의 파편과 주변 군상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입니다.

김씨의 연극 동지인 연출자 손진책씨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단아해지는 조각도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한 인간의 모습 속에 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고전적 절제미로 조각해냈습니다. 사회가 어렵고 각박할수록 살아있음에 대한 고마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지요. 그 따듯한 인간미 속에 담아낸 감사와 사랑의 절제미가 이 작품 감동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승현 선임기자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