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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 리처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21세기북스

소설가 박경리는 건강이 악화됐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아픈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에게 일은 살아 있음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을 쓴 한나 아렌트는 맹목적인 일에 대해 경계를 표한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나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효율적인 가스실을 설계한 아이히만을 예로 들며 맹목적인 과학과 무지막지한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일상의 탈을 쓴 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아렌트는 1962년 핵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뉴욕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저자에게 이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렌트는 “발명의 여신 판도라는 인간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지상에 내려보낸 것”이라며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일터의 주인이 아니다. 정치가 더 높은 위치에서 물리적 노동을 이끌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만을 묻는 일하는 동물,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가 아니라 ‘왜?’라고 물을 수 있는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게 인류 구원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도 일정부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자연에서 100만년이나 걸려야 생성되는 화석연료를 현재 단 1년 만에 써버리는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 스스로 화를 부르는 판도라의 이미지를 충분히 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에 나온 ‘희망’을 물질주의와 문화를 결합한 문화적 물질주의, 물질문화에서 찾았다. 저자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서 “우리가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더 잘 알게 되기만 한다면 ‘호모 파베르’보다는 ‘아니말 라보란스’에게서 희망을 찾고 싶다”고 당시에 미처 하지 못한 반론을 아렌트에게 펼치고 있다.

이 같은 바탕에서 저자는 ‘장인의식(craftmanship)이 결코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시들어버린 생활방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인의식은 면면히 이어지는 인간의 기본 충동이며,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해내려는 욕구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의사, 예술가의 일에도 장인의식이 살아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를 기르는 일도, 시민으로서의 행동도 장인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공동체적 유대’ 속에서 개인의 재능보다는 기능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중시했던 그리스 석공에서부터 노동을 함께하는 성직자이기도 했던 중세의 장인, 그리고 근대 이후 수공업 장인 등 장인의 역사에 대해 추적하며 마스터와 도제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18세기 이후 첨예화한 장인과 기계와의 갈등에 대해 지적했다. 장인과 기계는 처음에는 친구였지만 기계는 번번이 적이 됐고 장인은 결국 완벽한 기계적 균형보다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내는 불규칙성의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장인은 ‘망설이고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장인의 손과 머리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주목했다. 뛰어난 장인은 구체적인 작업과 생각 사이를 오가는 대화를 하게 되고 이 대화는 반복적인 습관으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손과 머리는 하나이며, 행동하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게 장인의 일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장인의 방식으로 행동과 이론을 분리하는 것을 비롯해 기술과 표현, 장인과 예술가, 제작자와 사용자 등을 나누면서 잃어버린 현대문명의 생각하는 손을 되찾자고 역설했다.

김승현 선임기자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