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7월28일 서울 중구 필동1가 샘표식품 회장실에서 “요즘은 건강이 경쟁력이며, 최고경영자의 건강이 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김선규기자

56년간 간장업계 1위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현존하는 국내 최장수 브랜드, 창업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흑자경영·흑자배당 실현, 56년간 국내 간장업계 1위 자리 수성,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은 기업…. 한국의 대표 장수 기업인 샘표식품의 주요 이력들이다. 7월28일 박승복(89) 샘표식품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취재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은 ‘장수 경영’의 비결이었다. 국내 기업의 평균수명이 10여년에 불과할 정도로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요즘 창업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간장업계 1위 자리를 수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서울 중구 필동1가 샘표식품 본사에서 박 회장을 대하는 순간 89세라는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메모지 한장 펼쳐놓지 않고 1시간30여분에 걸쳐 열정적으로 쏟아놓은 그의 경영철학에는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국내 최장수 브랜드 샘표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천천히 제대로’, ‘넓고 깊게’… 장수경영 비결

이날 인터뷰를 위해 샘표 본사 회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국내 최장수 브랜드 기업의 ‘연륜(?)’이 물씬 묻어나는 회장실 사무집기였다. 부친이 계실 때부터 사용해왔다는 40년이 훌쩍 넘은 금고, 20년 가까이 됐다는 소파, 박 회장 자택에서 식탁으로 쓰던 것을 옮겨와 재활용하고 있다는 회의용 탁자…. 그는 요즘도 달력 뒷면을 메모장으로 활용한단다. “대기업 회장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니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는 “물자가 귀한 시대에 나서 자라며 몸에 밴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샘표 초창기의 ‘헝그리 정신’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부친인 고 박규회 창업회장이 샘표식품을 창립한 건 광복 직후인 1946년. 이후 64년이 지난 지금까지 샘표는 간장을 중심으로 된장, 고추장 등 전통 장류와 발효식품 전문기업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샘표는 창업한 지 8년 만인 1954년 국내 간장업계 1위로 올라선 뒤 지금까지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국내 전 업종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지고 방자해져서 마침내 위기를 맞고 망하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을 항상 염려해야 한다는 의미죠. 저는 샘표의 경영을 맡은 이후 단 한순간도 이 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샘표 창업 6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그는 ‘천천히 제대로’라는 말을 샘표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더디 가더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박 회장은 “겨울밤, 어머니가 메주를 띄우고, 다시 말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으로 장을 담그듯이 세상사 모든 일도 장을 담그듯이 하면 탈이 없다”고 말했다.

‘한 우물을 넓고 깊게 파는’ 경영전략도 빼놓을 수 없는 샘표의 장수 비결 중 하나다. 샘표는 현재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를 비롯해 소금, 식초, 물엿 따위의 조미식품과 국수류의 가공식품 등 다양한 먹을거리를 만드는 종합식품회사로 발전했지만 전체 매출에서 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달한다. 그만큼 간장을 중심으로 한 우물만 파온 셈이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가 땅 속의 물을 잘 찾아가는 것처럼 한 우물을 넓고 깊게 판 기업이 블루오션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는 기업의 외형을 키우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너도나도 기업의 확장에 관심을 둘 때 나는 외형보다는 내실, 결과보다는 과정, 외부의 평가보다는 나 자신과 직원들의 만족에 가치를 두는 샘표를 꿈꾸었어요. 분명한 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기업은 야망이나 과욕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실이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내 가족이 먹지 않는 것은 만들지도 팔지도 않겠다’

박 회장의 집무실 책상 옆에는 창업회장인 부친의 중년 무렵 사진이 걸려 있다. “아버지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일하자”는 뜻으로 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학교이자, 위인전이자, 사서삼경이었다”고 말한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등 인생의 굵직한 교훈들을 비롯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셨다는 것.

지난 1976년 부친이 돌아가신 뒤 샘표의 경영 일선에 뛰어든 박 회장은 “내 가족이 먹지 않는 것은 만들지도 팔지도 않겠다는 것이 샘표의 정신”이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는 평소 간장과 같은 기본 먹을거리 만큼은 지위나 재산의 정도를 떠나 똑같이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주먹구구식 식품 생산과 경영이 판을 치던 시절, 속칭 ‘먹는 것으로 장난 치는’ 업체들이 난립하던 시절에 샘표가 무모할 정도로 생산설비 현대화와 품질경영을 위해 돈을 쏟아부었던 것도 ‘내 가족이 먹을 음식을 내가 만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책임감과 장인정신에 대해 소비자들은 ‘56년간 업계 1위’라는 평가로 화답해준 셈이다.

항상 활짝 열려있는 회장실 문… 투명경영

예나 지금이나 박 회장의 집무실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다. 밖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도, 오후에 잠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샘표의 경영을 맡은 이후 직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문턱을 낮추고 내가 먼저 직원들에게 다가가자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어놓게 되었다”고 말했다. “‘활짝 열린 방문처럼 내 마음도 활짝 열려있다’는 일종의 상징이고 다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회장은 “권위를 힘으로 지키려고 하면 무너지지만, 나를 낮추고 나누려고 하면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열린경영은 투명경영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샘표는 지난 1970년대 말부터 분기마다 직원들에게 매출을 공개하고 있다. 담당 부서 직원이 직접 차트를 준비해 매출이 얼마고, 이익은 얼마며, 지난 분기에 비해 어떤 변동이 있었는지 직원들 모두에게 알리고 있는 것. “회사는 월급을 더 올려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고, 어느 해는 노조가 임금을 올리자고 제안하는 걸 미안해하기도 했다”는 게 박 회장의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60년이 넘는 샘표 역사상 노사 갈등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지난 1980년대 중반 샘표에 노조가 설립된 뒤 6·29선언을 전후해 전국에 파업 광풍이 불었을 때도 샘표에서 만큼은 파업이 아닌 노사간 대화로 문제를 풀어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신체나이 49세…‘식초 청년’

박 회장은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89세,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러나 이는 ‘숫자’로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실제 접한 그는 놀라운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7월 들어서도 일본의 지인이 상을 당해서 한번, 최고경영자(CEO) 세미나 참석차 또 한번, 이렇게 두차례나 일본에 다녀왔다. 중국이나 일본 정도의 해외출장은 ‘이웃집 드나들듯’ 한단다. 아직도 안경을 쓰지 않고 신문을 정독하고 있고, 머리 염색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지난해 건강검진 결과를 알려주던 의사가 ‘회장님이 저보다 더 젊으십니다’라며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네더군요. 대개 50세가 넘으면 콜레스테롤, 혈압 등의 수치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인데, 검사 결과가 모두 정상이고 중년 이후의 한국인들이 주의해야 하는 신장질환 및 당뇨 등 성인병도 없이 깨끗하다는 거예요. 의사 선생 말이 ‘49세에 버금가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는 최근 30여년간 건강검진을 제외하고 아파서 병원에 가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식초’다. 박 회장의 ‘식초 사랑’은 그가 지난 2005년 ‘생로병사의 비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직접 경험한 식초의 효능을 밝히면서 많이 알려져 있다. 과연 식초 하나만으로 그토록 놀라운 건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다.

“식초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지난 1980년 일본 출장길에서였어요. 호기심에 일본 서점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식초 관련 책이 수십권 있었고, 그 주변에는 책을 살펴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더군요. 그 후 관련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았습니다. 식초는 건강뿐만 아니라 피부미용, 다이어트, 노화 방지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더군요. 식초와 그 관련 분야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게 세차례나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그만큼 식초의 효능은 과학적인 근거가 충분한 겁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하루 세번 식후에 꼬박꼬박 식초를 마시고 있다. 처음에는 역한 냄새를 참으면서 사과식초와 물을 희석해서 마셨는데 샘표에서 현미를 발효 숙성시켜 만든 식초인 흑초(‘백년동안’)를 개발한 뒤로는 흑초를 마시고 있다. 그는 “식초의 효능을 국민들과 더불어 더욱 가깝게 나누기 위해 흑초 개발 만큼은 샘표 연구진을 독려하며 내가 진두지휘했다”면서 “흑초는 각종 영양소가 보통 식초보다 5~10배 많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건강관리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한데 만일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식초를 적극 권하고 싶다”며 “이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쉽고 확실한 건강관리 비법”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건강이 경쟁력이고 능력인 시대예요. 몸을 해치면서 일에 매진하는 것은 제 세대로 마감해야죠. 지금은 CEO의 건강이 주가에도 영향을 주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나이들고 싶네요.”

“100세 정도 넘기는 건 자신 있다”는 그가 앞으로 한국 산업계에 또 어떤 신화를 써나갈지 경제계가 주목하고 있다.

인터뷰 = 김병직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bj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