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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유미라는 존재가 생긴 날을 엄마는 표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엄마는 불행히도 아기를 잉태시킨 씨의 임자를 명확히 찾을 수 없어서 한때 고민했던 모양이다. 노트의 어느 페이지를 보니 혈액형 도표가 그려져 있었다. 엄마는 O형, 유미도 O형이다. 아마도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의 혈액형은 A형, O형, B형인가 보았다. 그러나 O형은 변별력이 낮은 혈액형이다. 세 남자와 몸을 섞으면 모두 O형의 피를 가진 아이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 엄마가 O형이듯이, 유미는 O형이며, 엄마 오인숙이 오씨(吳氏)이듯이 유미 또한 엄마 성을 물려받아 오유미로 살아왔을 뿐이다. 오래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한 여인의 덧없는 생의 기록이 이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을 다시 쇼핑백에 넣고 유미는 자신의 컴퓨터를 부팅했다. 엄마의 기록이 얇은 노트 한 권이라면 자신의 생의 기록은 컴퓨터와 인터넷 시스템 속에 존재한다. 한동안 블로깅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상한 메일을 받은 이후엔 더 그랬다. 그동안 유미가 무시무시하게 벌여 놓은 네트워크라는 세력이 어느 날 갑자기 유미를 죽이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유미는 보이지 않는 익명의 적들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상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유미는 e메일 박스로 들어가 e메일을 체크했다. ‘홍두깨’로부터 혹시 무슨 e메일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로부터 온 메일은 없었다. 그러나 수신확인란을 체크하니 놀랍게도 그가 몇 시간 전에 메일을 읽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그동안 ‘읽지 않음’이란 표시가 쭉 뜨기에 장난성 메일이었나 보다며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던 터였다. 막연하던 불안감이 다시 상처가 도지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가 유미의 메일을 읽었으니 곧 답을 해 올지도 모른다. 그의 답에 따라서 어쩌면 이제부터는 전쟁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 그가 유포하려는 동영상을 막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촘촘한 세포로 연결되어 있는 유미의 인터넷 네트워크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처럼 대책 없이 퍼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조만간 블로그를 폐쇄해야 할지 모른다. 아예 숙주를 죽여 버리는 게 최소한의 예방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얼굴 없는 미지의 적을 상상하려니 분노보다는 그저 막막했다. 마치 엄마가 간직한 구멍 뚫린 사진 속에서 얼굴 모르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다음 날 유미는 박용준을 불러서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홍두깨’라는 아이디의 e메일 주소를 주며 IP추적과 신상정보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건 좀 다른 분야라서…. 사이버수사대 뭐 이런데 신고해 보죠?”

“그럴 성격이 아냐. 그냥 은밀히 좀 알아보고 싶어서…. 왜, 어려워?”

“글쎄요….”

“그럼, 관둬.”

“아뇨. 어떡하든 알아볼게요.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요.”

“그건 아직 안 나왔어?”

유미는 전에 부탁했던 일의 결과를 물었다.

“예? 아아….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라서요.”

“주민등록 말소?”

“예, 그렇다는데요?”

“알았어. 참….”

유미는 망설이다가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