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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면을 쓴 동물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 일이다. 푸슈킨의 시였던가. 삶이 인간을 속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삶을 속이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일수록 더욱더 가면을 쓰고 삶을 연기하게 된다.

정효가 바람처럼 다녀가고 난 후 유미는 좀 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유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 같아도 유미를 자유롭고 여유롭게 했다. 마치 물고기를 물에 방생하듯 자연스레 유미의 숨통을 트여놓았다. 그게 이상하고 묘했다. 옛 남자 진호가 아닌 구도자로서의 정효는 유미에게 그런 존재다. 삶을 견디는 강력한 단 한방의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유미는 또 한동안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낼 것이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삶은 매 순간을 순간 이동하는 것이다. 유미는 현재의 삶의 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게 유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때마침 유미를 현재의 삶으로 강력하게 끌어들인 건 바로 윤 이사였다. 정효가 다녀가고 난 이틀 후, 한 남자가 전화를 해왔다. 마침 퇴근을 하고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쉬고 있을 때였다.

“오유미씨 되시죠?”

“예, 그런데요.”

“지금 집에 계신가요?”

“누구시죠?”

“선물 배달 왔습니다.”

선물? 택배기사인가? 아님 누가 꽃이라도 보낸 걸까?

“잠깐 내려와 보시죠.”

“집까지 배달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좀 큰데….”

“…?”

“그럼 그럴까요?”

잠시 후 남자가 벨을 눌렀다. 현관문을 여니 택배기사가 아니라 정장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잠깐 유미가 의아해하자 그가 웃으며 명함과 함께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자동차 키였다.

“윤동진 이사님이 보내셨습니다. 선물을 한번 확인해 보셔야죠. 집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기어이 윤 이사가 차를 선물로 보냈구나. 그러면 그렇지. 유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미는 건네받은 자동차 키를 보았다. 삼각별 마크의 마르세데스 벤츠. 유미는 남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세워둔 자동차로 갔다. 흰색의 잘 빠진 반짝이는 신형 벤츠 한 대가 군계일학처럼 눈부시게 서 있었다.

“이사님이 차 선택에 아주 많이 고심하셨어요. 요즘 30대 전문직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 좋은 차입니다. 스타일이 죽이죠. 이렇게 보디라인이 잘 빠진 차는 벤츠 CLS 모델이 최고죠. 정말 이 차와 잘 어울리겠어요. 차 주인의 이미지에 딱 맞는 차네요. 하여간 이사님 안목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윤 이사님께 차 여러 대 팔았나 보죠?”

“아, 그럼요!”

“그분이 여자 보는 안목도 뛰어나죠.”

유미가 지나가는 투로 말하자 남자가 뭔가 찔리는 듯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윤동진은 여자들에게 자동차를 선물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는 완만하고 유려한 곡선으로 미끈하게 잘 빠졌다. 아무리 못 줘도 일억은 넘을 것이다.

남자는 자동차의 여러 장점을 설명하느라 입에 침이 튀었다. 남자가 돌아가고 나자 유미는 운전석에 앉았다. 반짝이는 작은 궁전에 들어와 앉은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무언가가 유미의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