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여명 속 혼신의 결정체 이른 새벽 최웅택 사기장이 가마에서 갓 나온 막사발을 여명에 비춰보고 있다. 가마에 2000여점이 넘는 작품들이 구워지지만 세상에 나와 빛을 보는 작품은 수십점에 불과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느 조선 도공이 만든 찻그릇을 애지중지하며 간직했다.

이 사발은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졌으나 이 사발을 가지고 있던 사람마다 우환이 생겼고 한맺힌 조선 도공이 꿈에 보였다.

결국 이 찻그릇은 일본 교토(京都)의 대덕사 고봉암에 보관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국보 26호 ‘기자에몬 이도차완’이다.

그로부터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국에서 건너온 한 젊은이가 ‘기자에몬 이도차완’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젊은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 찻잔에서 자신의 고향땅 흙냄새와 선조들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가 400여년간 맥이 끊긴 가마터에 다시 불을 지펴 조선 도공의 웅천 찻사발을 재현한 최웅택(54)씨다.



최씨가 어릴 적 뛰어놀던 경남 진해시 웅천 보개산 기슭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도공들이

조선사발을 만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씨는 어린 시절부터 산기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조선사발의 파편을 볼 때마다

이 지역 도공들의 혼을 뒤집어쓴 듯

강렬한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옛 도공들이 모두 일본으로 납치되었고

그 이후로 가마터에 불이 꺼졌음을

동네 어른에게서 전해들은 최씨는

자신이 그들의 후예임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보개산 흙 속에 뒹구는 수천 점의 도편들을 보면 산 속에서 그릇을 구우며 살아가셨던 그때 그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도편 속에 박혀있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집니더.”

그는 먼 이국땅에서 떠도는 조선 도공의 원혼들을 위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옛 웅천 가마에 불을 지펴

웅천 찻그릇을 재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말 없는 사기 조각이 스승이고, 옛 가마터가 학습장이지예. 지는 죽어도 웅천의 방식대로 할깁니더.”

그의 말대로 그는 철저하게

옛 도공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일단 보개산을 오르내리며 배낭에

삼백토(백, 황, 적 세 가지 빛깔의 흙)를 파온다.

한 달 동안 줄곧 흙을 파서 1년에 네 번 불을 땐다.

그는 또한 조선시대 도공처럼 발물레만을 고집한다.

“발물레질을 안 하면 사발에 숨결이 없습니다. 그릇은 물레가 돌아가는 대로 만들어지거든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질을 하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더.”



활활 타오르는 전통 가마의 불구멍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자신이 만든 찻사발에 향기로운 차를 타서 건네준다.

두 손에 받쳐든 찻사발에서 마치 어머니 가슴처럼

아늑한 온기가 전해진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볼수록 은근하고 기품이 있다.

불 땔 때 가마에 2000여점을 굽지만 모두 깨뜨리고

이삼십여 점만 남긴다고 하니,

찻사발에서 웅천사발의 맥을 이어가려는

최씨의 노력과 정성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이른 새벽, 가마 곁을 지키던 그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대학응급실에 실려가셨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임종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그는 가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동틀 무렵 마지막 불을 지핀 그는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조선시대 도공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가 남긴 한마디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발은 조상의 얼이며 숨결입니더.”


사진·글 =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보개산 가마터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경남 진해시 웅천 보개산 기슭에 자리한 최웅택 사기장의 가마에 밤새 불이 지펴지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1400도 소나무불 1년에 서너 번 불을 지피는 너구리 가마에 소나무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1400도의 온도가 지속되도록 밤새 불을 지핀다.

이미지 크게보기선택한 자식들 한 번 불을 지피면 그 속에 2000여점이 들어가는데 가마에서 나왔을 때 20~30여점뿐이다. 제대로 된 그릇이 아니면 모조리 깨뜨린다.

이미지 크게보기한 생명의 잉태 활활 타오르는 전통가마에서 조선도공의 맥을 잇는 막사발이 새생명을 얻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소박한 온기 웅천 찻사발을 두 손에 받쳐들면 마치 어머니 가슴처럼 아늑한 온기가 전해온다. 멋을 부리지 않아 소박하지만 기품이 서려있다.

이미지 크게보기장인의 발물레질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발물레질을 하는 최웅택 사기장의 모습에서 이 시대 진정한 장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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