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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장례미사가 끝나고 썰물처럼 추모인파가 빠져나간 뒤 명동성당은 허전했습니다. 그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볼 수 없어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날 따라 황사가 서울 하늘을 흐릿하게 누르고 있습니다. 허전한 가슴은 흐릿한 하늘처럼 다시 막막해집니다.

끝도 없이 밀려들었던 추모객들을 두고 여러가지 분석들을 하지만, 실은 그 막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더욱 어려워진 시기에, 큰 어른의 그늘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뻥뚫린 허전함과 턱 막히는 막막함이 그들을 불러모으지 않았겠습니까. 명동성당에 온 분들이 그저 천주교 신자들이 아니라 종교를 불문하고 몰려든 걸 보면 말이지요. 우리는 그 어른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으며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영혼이 16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0일 그의 여든일곱 육신은 우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원래 왔던 곳으로 모두 돌아갔지만 김 추기경은 우리 곁에 다시 살아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불경한 말이 될지 몰라도, 아마 예수의 부활도 육신의 부활보다는 그가 짧은 생에서 온몸으로 보여줬던 사랑이 온 인류를 비출 만큼 살아돌아온 것이 아닐까. 그것을 2000년 전 전기작가들이 예수의 부활로 기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김 추기경의 5일장 내내 추기경의 삶을 반추하며 일종의 ‘종교체험’을 했던 것은 아닐지요. 자기를 비우고 비울 때 거기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면서 근래 다시 주목받는 신비주의의 그 종교체험 말입니다. 말하자면 김 추기경은 나지막이 얘기하면서도 기가 막힌 ‘부흥사’였던 셈입니다.

한번 돌아보지요. 나흘간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은 대충 40만명에 달했습니다. 전국 주요성당에도 빈소가 차려졌지만 그 조문 숫자까지는 백만단위로 계산이 잘 안나옵니다. 날씨가 쌀쌀했고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10초 조문을 할 수 있었지만 행렬은 줄 줄 몰랐습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기다리는 인내심이 강해졌는가, 스스로들 놀랐습니다. 그분이 원하지 않았고 그같은 결정이 나지도 않았지만 김 추기경의 장례는 자연스럽게 국민장(國民葬)이 됐습니다. 장례미사의 실시간 TV시청률도 20% 안팎이었답니다. 이런 현상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없는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김 추기경의 장례미사 전날인 19일 하루에만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무려 740명이 온라인으로 장기기증을 등록했습니다. 이 운동본부의 온라인 장기기증 등록건수로 최고 기록이랍니다. 그 전에는 평상시 하루 15명 정도가 등록을 했는데, 김 추기경 선종 후 각막기증 소식이 알려진 다음 17일 하루에 153명으로 여섯배 이상 증가했고, 18일에는 250명으로, 19일에는 평시보다 무려 서른배 많은 사람들이 등록한 것입니다. 미혼모 자녀의 입양문의와 기부단체에 문의들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숫자 얘기말고, 조문객들 중에는 여야 정치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 우리 사회단체의 보수적 인사도, 진보적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맨 싸움박질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김 추기경의 뜻을 이어 화합하지고 입을 모았지요. 닷새나마 우리는 화합의 기운 속에 푸근했습니다. 이제야 돌아보니 그분의 삶에 진보니 보수니 잣대를 들이댄 것은 참 촌스러운 노릇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냥 한곳에 있는데, 잣대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깝친’ 셈입니다.

평소 모른척 하던 종교인들도 너나 없이 모였습니다. 인터넷에선 주로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숫자로 세기 어렵게 조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김 추기경이 가시면서 남긴 “서로 사랑하세요”란 한마디가 우리 구성원 사이의 이념간, 정파간, 종교간, 세대간 벽을 보기 좋게 허물었습니다.

또 하나만 예를 들지요. 김 추기경은 의식을 잃기 전에 의료진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분이야 누구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지만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다 죽음을 맞는 것이 존엄한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이를 통해 ‘존엄사’ 곧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확산됐고 또 법적으로도 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논의와 재판이 있었지만 그분은 가시면서 말없이 영향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걸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김 추기경의 ‘원력’이랄 수밖에요. 우리 모두는 종교체험을 한 것이고요. 문화일보는 그것을 ‘김수환신드롬’으로 먼저 이름 붙였고, 그의 ‘부활’로 표현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분의 빈 자리를 누가 메울 수 있겠는가’라고 슬퍼했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에 막막하고 슬픕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그분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겁니다. 그분은 자신의 빈자리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 모두가 메워주길 바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그 말을 따르려는 노력이면 충분합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