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곽성호기자

모시던 상관과 동석한 술자리에서 상관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자 현장에서 “그렇게 하시면 안된다”고 일침을 가한다. 모래시계나 ‘공공의 적’ 같은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옴직한 장면 같지만 실제 있었던 얘기다. 정홍원 이사장은 검사 시절 공사(公私)가 분명했다. 그가 지난달 20일 법률 복지의 중추기관으로 꼽히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사회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는 결코 아니고, 봉사하는 마음이라고만 받아주세요.”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실에서 만난 그는 사회적 약자 편을 선택한 이유부터 말문을 열었다.

―취임하고 한달을 갓 넘기셨는데, 업무 파악은 되셨는지요. 공단을 냉정하게 진단해주시죠.

“지금도 파악 중입니다(웃음).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기관인데, 너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게 큰 문제로 여겨집니다. 제가 이곳에 취임한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공단이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경우도 적잖았습니다. 국선 변호사제도와 각종 서비스제도가 섞여서 그런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공단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도 일반 변호사와 견줘 상대적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싶습니다. 전문성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겠습니다.”

―전문성을 강조하시는데, 공단을 찾는 사회적 약자들이 보다 전문적인 법률 상담을 원한다는 의미입니까.

“최근 들어 경기 침체로 인해 일터를 잃은 서민이나 과도한 부채로 파산상태에 처한 신용불량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재기나 신용 회생을 돕기 위한 법률 지원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또 급변하는 사회 흐름에 따라 국제결혼여성이나 성폭력피해여성, 장애인의 구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단은 아시다시피, 1987년 설립 이래 생활보호대상자와 국가유공자, 결손가정 등을 상대로 꾸준히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농어촌지역은 더더욱 공단을 이용하기 어렵습니다.

“때마침 지난 6월29일 법률구조법을 손질해 전국 101개 농어촌 지역에도 공단 사무실을 설치하게끔 돼 있습니다. 재정여건을 감안해야 하니까 내년부터 2013년까지 시군단위까지 단계적으로 설치될 예정입니다. 현재 전국에 걸쳐 56개소, 즉 검찰청과 법원이 있는 지역은 모두 설치된 만큼 무료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무실을 늘리려면 인력 충원도 뒷받침돼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135명의 공익 법무관이 근무하고 있고, 공단소속 변호사는 41명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소속 변호사 규모를 확대해나가야 합니다. 솔직히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 모두를 변호사가 직접 상담하지 못합니다. 저희 공단의 일반 직원들이 먼저 상담합니다. (법적) 절차적인 문제들은 직원들 선에서 해결하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변호사하고 연결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근무 환경이 열악한데도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점에 대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공단소속 변호사의 경우 죄다 자원자일텐데, 오로지 자원자가 많아지길 바라는 게 무리가 아닙니까.

“여기 (소속 변호사의) 보수는 검사 수준으로 맞췄습니다. 거기에 구조 수당이 약간 붙습니다. 대형로펌의 변호사 보수하고는 견주기가 민망합니다. 봉사할 의지가 있는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공단에 있는 동안 나름의 소명의식이랄까, 사명의식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 말씀드릴까요. 저희 소속 변호사를 조세나 환경 쪽 전문가로 육성한다고 치면 필경 로펌에서 데려갑니다.”

―경력세탁 차원에서 공단에 들어왔다 가는 변호사가 없지 않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맞습니다. 사명감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앞으로 과제로 삼아 전체적인 비전을 갖도록 하기 위해 미래기획단을 만들었습니다. 말이 쉽지 사명감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보수를 포함해 뭔가 메리트가 있어야 합니다. 법무부 예산 가운데 교도관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차지하고, 여기는 예산을 투입해도 티가 잘 안납니다. 차라리 우리 보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라고 하면 벌겠는데…(웃음).”

―사법 문턱을 낮추기 위해 내년 시행에 들어가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제도는 공단 입장에서 긍정적입니까.

“취지야 맞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지점이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해야 변호사가 되는데, 돈만 들이고 시험에 통과되지 않으면 낭인만 양산합니다. 로스쿨이 고시 공부방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법대 4년, 고시준비, 연수원 등 7~8년을 들이고 법조인이 되는 것과 견줘 3년 공부해서 탄생하는 법조인이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두달여 동안 계속되는 촛불시위를 지켜보며 법이나 질서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법률가로서의 해답이 있습니까.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것, 저항이 옳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법 지키는 사람이 득을 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때마침 저희 공단업무 중 하나로 준법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깊이있는 연구가 계속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준법 마일리지 등 법을 지키는 사람이 이득을 보는, 준법 경력이 혜택을 받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다른 것보다도 기초질서 준수에 대한 교육이 철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의식이 변해야 하고, 법을 지키려는 작은 실천들이 몸에 배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예전 검사 사회에서 소시민적인 운동 차원에서 시도한 게 있습니다. ‘집안에 하나씩 미덕을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사를 잘하자든가, 남한테 피해를 주지 말자든가를 가정별로 대물림해가면서 교육하면 의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샤워를 마친 후에는 항상 욕실에 새 타월을 걸어놓고 나옵니다. 가족들을 위한 배려라고 시작했는데 아들은 아직 안 지킵니다. 그가 스스로 할 때까지 직접 말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그런 것을 하나씩 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한테도, 사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죠.”

―사법계의 뼈를 깎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법 전반에 걸쳐 국민의 불신은 여전합니다.

“제가 답변하는 게 외람될 만큼 큰 문제입니다. 법철학에서 정의의 개념은 ‘각자에게 그의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돈 받을 사람은 돈을 받고 (징역)5년 받을 사람 5년 받아야 하는데, (징역)5년 받을 사람이 1년 받고, 돈 받아야 할 사람이 돈 못받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사법 불신이 싹텄습니다. 검찰과 법원이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인간이니까 완벽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 70~80%가량은 (사법계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법조인들이 합심해 노력해야 불신의 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공단도 거기에 보탬이 돼야겠죠.”

―법률가 외의 다른 길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특수부에 근무하면서 인지수사를 많이 했고, 사회악을 척결하다보니 보람과 긍지도 많이 느꼈고, 나름대로 사회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많은 사람을 구속하고 그런 것이 정말 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아닌가 마음에 걸리기도 합니다. 조금 더 폭넓게 살았어야 했는데, 자기 정의에만 너무 집착한 것이 아닌가 반성합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교수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사범학교 졸업 후 법조인의 길을 택한 사연이 있습니까.

“저는 12남매 가정에서 자랐는데, 셋째형이 고시 공부를 하다가 결국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유학자이시던 선친께서 (형의 낙방에) 실망이 큰 나머지 일종의 교육 무용론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여파로 부산 경남중을 다니던 저도 고향으로 소환됐고, 선친과 절충한 게 사범학교 진학과 가사 돌보기였죠. 사범학교를 졸업할 당시 형편이 조금 풀린 형님의 지원아래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오히려 사범학교에서 전인교육을 받은 것이 법조생활하는 데 많은 보탬이 됐습니다.

정홍원 이사장은 누구

후배 검사들은 그를 가리켜 검사의 교과서 또는 교장 선생님 같다고 한다. 사범학교 출신이기도 하지만 인자한 성품에 워낙 꼼꼼하고 일처리에 한치의 빈틈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1991년 대검 중수부 제3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수서지구 택지공급 비리사건을 맡았고 명성사건(1983년), 장영자 사기사건(1994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1998년) 등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지휘했다. 마치 용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화를 당하듯, 그를 잘못 건드리면 죽는다는 말도 이때부터 회자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매니페스토 선거운동방식을 도입했고, 작년 삼성 비자금 사건의 특별검사로 추천받을 만큼 법조계 안팎의 신망이 두텁다.

▲경남 하동 ▲진주사범학교·성균관대 법대 ▲사시 14회 ▲마산지검 거창지청장 ▲대검 강력부 과장 ▲부산지검 울산지청장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대검 감찰부장 ▲부산지검 검사장 ▲법무연수원장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법무법인 로고스 상임고문

인터뷰 = 문성웅 사회부장 swmo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