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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난해 한 신문의, 글 잘 쓰던 기자가 그만두었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다. 기자 대신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이렇게 추운날, 바깥 세상에 나서다니‘대단하다’ 싶었다. 많은 직장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일종의 꿈이다. 꿈인 만큼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이를 생각할수록 초라해지는 삶, 이런 것은 빨리 잊어버릴수록 좋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술 몇잔 마시거나 잠시만 일에 쫓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 뒤 얼마나 지났을까, 기자에서 작가로 하는 일을 바꾼 그가 장편 ‘파라다이스 가든’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번에는‘아,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다.‘오늘의 작가상’이 어떤 상인가. 1977년 제1회 수상자인 한수산을 시작으로, 제2회 박영한, 제3회 이문열로 이어지면서 문단의 거장들을 배출한 상 아닌가.

하지만 문학담당이 아닌 기자는 ‘파라다이스 가든’을 읽지 않았다. 공연히 그걸 읽고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대개의 신문들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파라다이스 가든’을 외면했다. 우리 회사 출신이 아닌 걸 뭐, 기자가 다른 회사의 기자를 칭찬하지 않는 것은 거의 생리에 속한다. 이 때문인지, 한달 전쯤 그에게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먹고 사는 게 참, 여간 아닙니다.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가 먹고 살기조차 어렵다면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불현듯 술이 생각났다.

#2지난 월요일, ‘일분 후의 삶’이 배달돼 왔다. 겉장도 제대로 보지 않고, 아무 곳이나 펴서 읽었다. 1992년 톈산산맥 최고봉인 포베다에 올랐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산악인 박태원씨의 이야기였다. 이번 주엔 산악 관련 책이 많군, 때마침 에베레스트에서 조난당한 18명의 남녀 이야기를 담은 ‘희박한 공기 속으로’(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황금가지)를 훑어본 참이었다.

그런데 글이 달랐다. 그냥 훑어보려고만 했는데, 책이 쉽게 놓아지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하고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전화를 받는 시간도,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책 제목이 무엇이며, 이걸 쓴 이가 누군가 해서 책의 앞뒤를 살핀 것은 책을 절반이나 읽은 뒤였다.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미친 듯이, 한 번은 찬찬히.”

책의 뒷 표지에 적힌 작가 이윤기씨의 짧은 소감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책을 쓴 이는 권기태, 바로 그 전직 기자였다. 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는 역시 다르구나, 기자였던 사람도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구나.

그러고 보니 그가 책을 내기 전에 한 말이 기억났다. 이번 책은 소설이 아닙니다. 기자로 일할 때부터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논픽션입니다. 실제로 생의 극한에 직면했던 사람들의 생존 이야기를 담았지요. 제 딴에는 엄청나게 공을 들였습니다. 책에 나오는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수십차례나 만났으니까요.

#3그랬다. 그렇게 들인 공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은 불시에 닥친 절체절명의 순간,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 열두 사람의 생존 기록이다. 책에 등장한 이들의 면면만큼이나 이들이 당한 위기는 여러 가지였다.

고도 7000m의 바위 절벽과 눈 구덩이에서 죽음과 마주한 산악인, 배가 침몰한 뒤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여성 실습항해사, 1993년 전북 부안의 격포 앞바다에서 침몰한 서해 훼리호를 탔다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공무원, 산사태에 묻힌 뒤 급류에 떠내려 가다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전직 버스 운전 기사, 흔들리던 10대 시절, 한강에 뛰어내렸다가 극적으로 생환한 뒤 신인왕전을 치르는 프로복서….

이들에게 한결 같았던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의 길로 다시 초대받게 한 힘은 생존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었다. “캄캄하게 흘러가는 그 모진 시간 속에서도”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집중했다. “죽음을 유예시키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었다.

이렇게 숨가쁜 위기를 다룬 책이면서도 특별히 감동스러운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아름다운 인간미가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밤 겨울 바다에 뛰어들며 튜브를 양보한 20대 항해사, 해발 7000m의 눈밭에서 한발짝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탈진했으면서도 낙오한 후배를 구하기 위해 다시 온 길을 되짚어가는 산악인, 수천m 직벽의 바위 절벽에서 낙석에 부상당한 후배를 끝까지 하산시키는 또다른 산악인.

“찬연하고 감동적인 기록이다. 저널리스트인 작가가 발굴해낸 삶과 생존의 신비가 프리즘처럼 빛난다. 단색화보인 우리 문학이 천연색으로 변화할 것 같은 예감이 찾아온다.”

작가 최인호씨가 적은 짧은 소감문이다.

#4“기자 출신다운 철저하고 세심한 사실 확인과 빠른 호흡, 소설가다운 극적인 진행, 생존자의 육성을 담은 단순한 건조체와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유려한 문체의 배합, 쉬우면서도 사유적인 문장….”

보도 자료에 적힌 글이다. 과장이 아니다. 아무리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지만, 자신이 직접 겪지도 않은 일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그려낸 논픽션은 경이에 가깝다. 그러니 같은 기자란 이름을 쓰면서도 책에 대해 이 정도로 밖에 쓸 수 없는 스스로가 부끄러울 수밖에. 할 말이 없다. 아무쪼록 책이 많이 팔려, 작가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