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에서 온 프롤레타리아입니다.”

1989년 1월 동토의 땅 소련 모스크바 동방학연구소. 합작 사업을 위해 이 곳에 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국가보안위원회(KGB) 대외총책을 지낸 실력자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소련 연방 붕괴후 러시아 총리를 지냄)와의 첫만남에서 한 말이다. 일순간 회담장은 얼어붙었고, 통역과 이명박(현 서울시장) 현대건설회장 등 관계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 최고의 부르주아인 정 회장이 ‘프롤레타리아’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말이 그대로 전달되자 이번에는 프리마코프가 통역에게 역정을 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도 구별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본 정 회장은 자신이 왜 ‘프롤레타리아’인가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첫째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고 둘째는 소학교밖에 못나왔고, 셋째는 노동으로 돈을 벌었다는 단순명쾌한 논리였다. 이 말을 들은 프리마코프는 정 회장의 탁월한 유머와 식견에 감탄하며 합작사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은 돈도, 기술도, 자원도 없는 나라 대한민국을 오늘날 세계12위의 무역대국으로 끌어올린 첨병들인 상사맨들의 이야기다. 뜨거운 사막의 땅 중동에서 얼어붙은 시베리아까지 누빈 현대종합상사맨들의 세계 시장개척사가 담겨 있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세계시장 개척의 문을 열다’에서 불굴의 의지로 돌파한 해외시장 개척 이야기가 담겨 있다. 2장 ‘세상을 누비다’에서는 수출 시장 현장의 고통과 애환, 환희를 다뤘으며, 3장 ‘정주영을 다시 기억하다’에서는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한 숨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70년대 한국경제가 살길은 수출뿐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무조건 상품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가발이나 의류 등 경공업 제품이 주조를 이뤘다. 정주영 회장은 이같은 한계 극복을 위해 중화학과 조선 수출, 해외공사 수주를 목표로 한 전문상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76년 현대종합상사의 태동 배경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현대맨이 아니라 선진조국 건설의 선봉대들이다. 정 회장은 그런 역군을 뽑았고, 그들이 개척한 수출시장은 눈부셨다. 현대종합상사는 다른 기업들이 주저했던 중동과 북방, 동유럽, 인도 진출로 한국 외화벌이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 그들의 도전과 성공은 수많은 후발 한국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는 촉진제였으며, 오늘 ‘세계 속의 한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우리나라는 지금 글로벌 수출시장의 중심에 서 있다. 1964년 겨우 1억달러를 수출했지만 불과 40년 만에 2800억달러에 이르는 ‘메이드인 코리아’를 수출하는 무역강국이 된 것이다. 이같은 신화는 상사맨들이 있어 가능했다.

이 책은 읽을수록 조국애를 느끼게 한다. 상사맨들의 노력과 땀이 투영된 수출개척사와 해외 진출을 위해 동분서주한 고 정주영 회장의 열정과 혜안이 절로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갔다는 추천사를 쓴 정몽준 의원의 말처럼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상사맨들의 열정이 가슴에 잔영으로 쌓이는 책이다.

김순환기자 so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