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깊은 지적인 능력과 학문적인 원천의 집단으로 축복받은 곳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는 하버드에서 리더십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리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예일(대)의 총장으로서는 드리기 어려운 말씀임을 믿어주십시오.”

지난 2001년 10월21일 하버드대 캠퍼스의 심장인 하버드 야드에서 열린 이 대학 27대 총장 로런스 헨리 서머스(51·사진)의 취임식에서 리처드 레빈 예일대 총장이 한 축사는 미국에서 하버드대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636년 창립된 하버드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미국 독립보다 140년 앞서 문을 열었다. 개교 이후 7명의 미국 대통령과 3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 명망 있는 정치가와 대법관, 학자, 예술가 등을 배출해온 하버드대는 세계 지성의 산실로 통한다. 98개 도서관에 장서만 1410만권에 이르며 현재까지 누적된 기부금 액수만 우리나라 1년 교육예산과 맞먹는 25조8000억원에 달한다. 비영리 단체로선 로마 바티칸 다음으로 많은 재산이기도 하다. 외형적인 규모 외에도 1960년대 반전운동과 흑인인권운동의 중심에 자리한 하버드대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양심의 목소리를 낸 ‘정신의 제국’으로도 유명하다.

책의 제목만 보면, 브랜드 가치 1위의 대학이자 세계 지성의 요람인 하버드대의 미국 내 위상을 설명해주는 내용으로 착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일반의 기대와 달리 ‘조지 매거진’의 전 수석편집자이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미국의 아들:존 F 케네디 2세의 초상’의 저자가 쓴 책은 기존에 출간됐거나 국내에 번역, 소개된 하버드대를 소재로 한 책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프리랜서 기고가인 저자는 21세기 들어 처음 선출된 하버드대 총장인 서머스의 취임이후 전개된 하버드대의 권력암투와 변화상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로런스 헨리란 이름보다 ‘래리’란 애칭으로 불리는 서머스가 총장을 그만두고 대학을 떠날 때 하버드대가 지금보다 더 거대하고 부유하며 힘이 있고 영향력이 커질 것은 명확하지만 진정 과거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란 게 저자의 메시지다.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이나 행동에서 여느 아이비리그 대학보다 진보적이었던 전통은 과거의 유물로 사라지고 생존을 위해 정계와 재계와 타협한 교육집단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책은 서머스 총장을 중심으로 하버드대의 최근 변화상을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한 것이다.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 서머스는 하버드대 역사상 최연소인 28세에 경제학과 종신교수가 된 수재였다. 1991년 워싱턴으로 진출해 세계은행 수석 경제연구원을 거쳐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서머스는 “1970년대 한국의 유소년 매춘부가 100만명에 달했다”는 실언으로 국내에서도 적지않게 알려진 인물이다. 서머스에 앞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루빈과 함께 멕시코 경제위기와 한국의 외환위기 사태를 조정한 핵심 경제관료였던 서머스는 2001년 무려 400 대 1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루빈의 지원으로 하버드대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할 27대 총장에 선출됐다. 재산 등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부정과 부패, 학생들과 교수들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사건, 학부교육의 부실화 등을 고민하고 있던 하버드법인에서 서머스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10년 간의 워싱턴 생활에 익숙해진 서머스는 취임하자마자 ‘워싱턴식’ 게임을 하버드 교정에 도입했으며 경쟁과 성과 위주로 대학을 운영했다. 미국흑인학과의 교수였던 코넬 웨스트가 정치적 활동을 서슴지 않고 수업에 소홀하다고 트집을 잡아 몰아낸 뒤 근거없는 소문을 언론에 흘린 사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서머스의 권력에 반하는 인물들은 처단돼 나갔다. 반유대주의 시위 등 잦은 시위도 줄어들고 항의자도 사라지는 등 하버드는 지난 4년 여 동안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었다. 생명과학에 집중 투자를 선언하고 ‘세계 각국에 하버드 분교를 설립하자’는 등 갖가지 비전을 제시했지만 현재 가시화된 업적은 하버드 캠퍼스를 인근 올스톤 지역까지 확장한 것뿐이란 게 저자의 지적이다.

책은 앞 뒤 꽉 막힌 불도저에다 무례하기 짝이 없으며 자신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가차없이 축출해온 서머스 총장이 지성의 제국인 하버드대에서 그동안 벌인 행적들을 살펴보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립관계 및 권력구조 등을 상세하게 파헤친다. 이를 통해, 정부권력과 사회를 감시하는 대사회적 기능은 상실되고 경쟁논리에 휘둘린 오늘날 교육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문은실 옮김. 최영창기자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