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가게나 증권사나 결국 신뢰를 판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한국투자증권의 사외이사로 8개월째 활동중인 이영석(38) ‘총각네 야채가게’ 사장의 비교체험 소감이다.

“증권사 사외이사라면 당연히 교수나 변호사, 금융전문가의 몫이려니 했는데 처음엔 얼떨떨했죠.” 사외이사 제의를 여러차례 거절했던 그는 김남구 부회장의 삼고초려에 “대기업의 기업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응했다.

“아직까지 이사회에서 저는 주로 듣고 배우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월급받으면서 밥값은 제대로 해야죠.” 이 사장은 짬짬이 가까운 한국증권 지점을 찾아 분위기를 살피는 한편 신입사원 최종면접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6일 열린 임직원 대상 사내 강좌에서는 진솔한 실전 장사 경험과 재기발랄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이끌어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징어 행상으로 시작해 전국에 17개 매장을 거느린 ‘총각네 야채가게’대표로 성공한 비결로 ‘박카스맨’의 시절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만권의 책보다 한 사람에게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믿는 그가 장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무조건 박카스를 들고 찾아가 직접 일을 거들며 배워 얻은 별명이다.

상식에서 출발한 상상력도 성공의 동력이 됐다. 바나나를 팔기 위해 원숭이를 구해다가 방과후 아이들을 공략하는가 하면, 농협 매장에서는 아가씨 도우미 대신 황소를 이용한 마케팅으로 매출을 끌어올렸다. 망해가는 친구의 치킨집은 매일 퇴근 무렵 인근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통닭 냄새를 피우는 작전으로 기사회생시켰단다. 지난해말에는 LG전자와 제휴해 ‘전자+야채’공동 판매점을 내기도 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라며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보다 열심히, 주인처럼 행동하면 정말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늘구멍만큼 좁다는 취업문을 뚫고 입사한 인재들이 꼭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일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저도 15년동안 야채장사하면서 몇번이고 ‘때려칠까’ 하는 갈등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런 마음으로는 다른 걸 해도 마찬가지라며 마음을 다잡았죠.”

매일 새벽1시에 일어나 시장에서 물건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경기 포천 경복대 객원교수와 기업 강연 등으로 바쁜 중에도 하루 1시간씩 증권공부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재테크는 아직까지 투자보다는 저축. 그는 “올해 주가가 많이 올랐다지만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졌다”며 내년에는 “실물경제와 주식시장이 함께 웃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수진기자 lul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