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원 보호구역인 남양주시 조안면의 한 농가에서 아내, 딸과 고슴도치 가족처럼 태평스럽게 산다. 틈틈이 동네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다 보니 자연스레 ‘정착’에 성공했다는 소박한 이 작가에게 누가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겼는가?

세상에 처음 선보인 1999년 첫 개인전부터 직설적인 ‘민중미술’과는 또다른 은유와 탐색으로 세상을 탐구하던 동양화가 성태훈(39·사진)이 중국 베이징 염황미술관에서 ‘벽으로부터의 반추’전을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지난해부터 그림의 주제가 된 ‘벽’시리즈는 전쟁 혹은 개발, 난데없는 붕괴 등으로 허물어진 폐허가 굵직한 수묵으로 그려지고, 그 위에 쏟아붓는 듯 세찬 물길이 그려진다. 그러나 세찬 물길은 동양수묵의 단골주제인 계곡이나 풍광좋은 강의 모습이 아니라 ‘도회적이기 짝이 없는’ 수도꼭지, 샤워기꼭지에서 퍼부어지는 물이다.

“사람을 갈라놓은 것이 벽 아닙니까. 구분, 단절이 되는 벽을 관통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상수도관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접하기 쉬운 물길은 멀리 보는 강이나 계곡이 아닌 집안의 수도관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이죠. 모든 페허를 씻어내리고 싶은 충동, 하얗게 지워버리고 깨끗하게 비워버리고 싶은 이미지를 담은 것이죠.”

그는 ‘벽시리즈’이전 선보였던‘동학’과 ‘역사현장 유배지’기행전 등에서도 날카로운 것 같지만 느긋하고, 심심한 것 같지만 날이 선 시각을 보여왔다. 홍대 동양화과 동기40명중 전업작가는 단 4명이 남은 상황에서도 성화백은 원색적이고, 직선적인 메시지의 민중미술, 갈수록 파격적으로 변화해가는 상업미술과 모두 거리를 둔채 묵묵히 작품활동에 몰두해왔다. 그런 그에게 연이어지는 붕괴사고, 사회의 변화, 9·11테러 등은 해마다 충격을 던졌다.

“어린 딸아이가 9·11테러당시 ‘아빠, 아빠 재미있쪄. 재미있는게 텔레비에 나왔쪄’하는 발음도 불분명한 목소리는 잊히지가 않아요. 아이 눈에는 도저히 현실로 보이지 않았던 그 풍경을 접하면서 머리와 가슴이 모두 멍해졌어요.”

이후 그의 벽시리즈는 분단, 정전의 현실을 지닌 우리의 상황부터 무너져내린 건축현장, 전쟁의 폐허 등으로 확대됐다. 그림속 물길은 화선지 고유의 여백미를 이용한 것. 아무런 채색도 가하지 않고 온전히 화선지 여백으로 물을 표현했다. 폐허를 응시하는 소녀, 폐허를 관통해가는 물길 등으로 나지막이 메시지를 건네는 그의 그림은 다음달 5일 서울 인사동 공평아트센터에서 가지는 개인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인표기자 l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