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은 바람둥이 문성근에게 애인을 두번이나 빼앗기는 여린 성품의 대학원생으로 나왔다. 박해일이 이미 마음이 떠난 배종옥에게 매달리며 “누나 가지마요. 나도 잘해요”라고 한 대사는 장안에 회자됐다.

최근 충무로에 나온 가장 독특한 멜로인 ‘연애의 목적’에서 박해일은 그 순진남으로부터 아주 멀리 간다. 프로 바람둥이 문성근의 계보를 잇는 확실한 작업남이다.

6년째 사귄 참한 애인을 두고, 역시 애인있는 교생(강혜정)에게 집요하게 대시해 결국 섹스하는 데 성공하지만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자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교사 유림이다. 그가 작업을 거는 공간은 학교, 그것도 보통 불량학생들의 집결지로 알려진 쓰레기 소각장, 비밀아지트 등이다.

강혜정을 향해 던지는 “젖었어요”라는 노골적인 첫대사의 배경은 학교벤치인데, 이들의 야한 대화는 수업 벨소리로 끝난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에서 탈권위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공간의 하나가 바로 학교일 것이다. 한때 가족해체에 나섰던 영화와 드라마가 일제히 학교해체, 학교파괴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일 정도다.

물론 이때의 학교는 공교육의 파괴, 폭력적 학원문화, 사회의 축소판으로서의 학교 등 사회적 이슈의 장이 아니다. 이제 학교는 연애와 섹스담의 주된 공간이다(‘로망스’가 사제간 연애로 테이프를 끊은 후 ‘건빵선생과 별사탕’은 스승과 제자, 제자와 제자 사이의 3각관계를 다뤘다. 학생들끼리의 연애는 중학생이 섹스하고 출산하는 ‘제니주노’까지 갔고, 이제 ‘연애의 목적’은 스승들끼리의 연애다).

‘연애의 목적’의 유림은 이같은 ‘학원로맨스물’의 주인공 중에서도 가장 지분거리고 비열하며, 교사다움과 가장 거리가 먼 불량교사다. 촌지를 밝히는 ‘선생 김봉두’, 젊은 교생에게 흑심을 품고 초등학생 제자와 대결하는 노처녀 교사(‘여선생 여제자’), 젊은 제자들의 육탄공세를 은근히 즐기는 미남교생(‘몽정기2’) 정도가 아니다. 학원로맨스물이, 세상은 비록 손가락질해도 그들은 떳떳하다며, 순결과 순정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유림의 ‘작업’은 추행이나 추문에 가깝다. 또 유림은 누구보다 제자들을 아끼는 ‘로망스’ ‘건빵선생과 별사탕’의 인간적인 교사들과도 정반대다. 애초부터 학생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철밥통이라 교직을 택했다는 안이한 그는 학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연애가 발각나자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한다.(심지어 여학생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찬다).

이같은 영화와 드라마의 학교, 혹은 사제간의 이미지는 ‘교육’이라는 권위의 급격한 붕괴를 보여준다. 뼈대만 남은 공적 제도로서 학교란 공간을 그나마 채우는 것은 연애나 우정 같은 개인적 관계와 사적 체험들, 혹은 로맨틱 팬터지이다(요즘 엄마들도 말한다. “학교는 친구 사귀러 가는 곳”이다).

박해일은 얼핏 선하고 순수한 청년의 이미지 속에 비열함을 감추고 있는 양면성의 배우다. ‘질투는 나의 힘’을 비롯해 ‘국화꽃향기’ ‘인어공주’가 순정남의 이미지를 선보였다면(시골소녀를 설레게 하는 반듯한 외지인 청년이라는 ‘인어공주’ 이미지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연애의 목적’에서의 유들유들하고 비열한 유림은 그가 가진 또다른 얼굴이다.

사실 그는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연적 문성근을 미워하기보다 동경하고 자신보다 약자인 하숙집딸에게는 잔인하게 대하는, 선한 얼굴 뒤에 감춰진 마초적 에너지를 내비친 바 있다. 소년의 연약함 속에 감추어진 야비하고 가학적인 모습은 그가 끝끝내 잡히지 않는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로 나왔던 ‘살인의 추억’에서 극단적으로 보여진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양면성의 배우라는 점이 우리가 박해일에게 주목하는 이유이자 ‘연애의 목적’의 유림을 끝끝내 미워할 수 없게 만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양성희 기자 cool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