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在先·박제가의 자)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에 들여온 요즘 중국인의 시필(詩筆) 서너 첩(帖)을 만일 빌려볼 수만 있다면 의당 이 며칠 사이의 불안정한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건만, 그 사람이 무상무도(無狀無道)하니 지보(至寶)라고 하여 잠시라도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지만 모름지기 한번 빌려 보렴.”

초정 박제가를 ‘무상무도’한 사람이라고 혹평한 것은 다름아닌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이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무상’은 버릇이 없거나 무례해 경우가 없는 것을, ‘무도’는 도리에 어긋나서 막되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동안 두 사람이 사제관계로 북학(北學)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인간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사이로 알려진 평가가 무색해지며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책은 연암이 60세 되던 1796년(정조 20) 정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가족과 벗들에게 보낸 33통의 편지글 모음집인 서울대박물관 소장 ‘연암선생 서간첩’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친일파였지만 평소 연암을 존경해 1932년 ‘연암집’을 간행했던 박영철이 연암의 형인 박희원의 현손 박기양으로부터 넘겨받아 소장하고 있다가 경성제대에 기증한 서간첩으로 이번에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다. 내용이 너무 사적이고 엄정하지(?) 못해 문집인 ‘연암집’에 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또다른 편지에서 문생인 백선(伯善) 부자를 ‘아둔하고 게으르다’고 지적하는 등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연암의 꾸밈없는 진솔한 속내를 살필 수 있는 것이 이번에 새로 공개된 자료의 장점이다. 심지어 인간적으로 깊이 신뢰했던 이덕무에 대해서도, “그의 ‘잡록’을 보니 모두 무관(懋官·이덕무의 자)의 조박(糟粕)과 소절(疎節·하찮은 일)에 불과해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고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되더구나.대체로 그가 서얼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은 연후에야 글의 요령을 얻을 수 있을 테지”라고 평할 정도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부탁한 글을 처남(이재성)에게 대신 지어달라고 하는 내용도 나온다.

유득공에게 빌려줬던 화포(花布) 두루마기를 군사훈련 때 철릭 아래에 받쳐입기 위해 다시 찾는 내용이나 언서(諺書·한글)를 쓸 줄 몰라 딸에게 써서 보내게 하는 등 연암 서거 200주년인 올해 처음 공개된 편지들엔 연암과 그가 이끈 북학파 문생들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자식들에게 보이는 깊은 부정(父情)이나 병약한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염려, 시집간 누이의 병에 대한 걱정, 며느리의 산후조리에 대한 근심 등 연암의 지극한 가족애와 함께 그의 강직한 성격, 서화취향, 유머스러운 면모 등 다양한 정보도 제공해준다. 박희병 옮김. 최영창기자 yc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