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젊은 날의 초상’을 묶은 책이다. 하지만 단순히 ‘젊었던 한 때’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행로를 뒤바꿔놓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경험이나 인식의 전환을 세세하게 펼쳐보이고 있다. 필진은 정혜신 박노자 고종석 손석춘 조정래 장회익 박홍규 김진애 홍세화 등 9명. 활동영역이 제각각인 만큼 각자의 글에서 보여주는 세계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정혜신은 정신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넘어야 했던 벽과 자신의 열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는 전공의 시절 스스로 정신분석을 받기로 결심하고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로 2년여의 세월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격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사 역시 환자적 속성을 갖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란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 정혜신은 정신과로부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라고 털어놓는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박노자는 1991년 9월 한국땅에 첫발을 내디뎠던 당시를 떠올린다. 개혁개방의 와중에서 급속하게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들고 있던 당시의 러시아에서 바라본 한국은 자본주의의 길을 충실히 걸은‘모범국가’이자 유교적 지혜로 충만한 나라였다. 하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선진 모델’이었던 한국에 대한 허상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한국 사회는 오히려 억압적인 러시아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것. 박노자는 “한국에서의 경험은 내게 억압의 보편성도, 기만의 보편성도, 고통의 보편성도, 억압에 대한 투쟁의 보편성도 가르쳐주었다”고 결론내린다.

이밖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프랑스에서의 연수생활을 통해 세계시민주의 입장을 확고히 갖게된, 언론인 고종석은 순수에 대한 광신적 열정을 줄이고 상대에게 문을 열어놓으라고 강조한다. 역시 언론인인 손석춘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울 공덕동에서의 삶을 통해 무자비한 ‘돈의 논리’와 한국언론의 실체를 드러낸다.

소설가 조정래가 털어놓는 가족사와 극심한 가난을 견뎌야 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회고는 몸으로 터득한, 치열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표본이다. 물리학자 장회익과 노동법학자 박홍규, 건축가 김진애, 언론인 홍세화 등이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고민과 해답을 얻기 위한 몸부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범답안으로 읽힌다.

김영번기자 zerokim@